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금강경과 반야심경 관련 해설

금강경에 의거한 걸림 극복 방법!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3. 21. 12:05

글을 쓰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내게 이익이 되고 이로움이 있으니 필자는 자꾸 글을 쓰는 것이다.

생각이 정리가 되고, 미처 생각치 못했던 통찰이 글을 쓰면서 발생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는 글을 쓴다.

나 자신을 알고 내 마음을 아는 것이 수행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필자는 그 방법 역시도

일기를 쓰고 얻은 배움과 교훈등을 메모하고 이렇게 글로 통찰을 정리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이 들은 걸림과 극복에 대해서 서술한 글이다.

지금 이 문장은 이 글을 다 쓴 뒤 작성하는 문장이다.

 

병을 고치려면 우선 병의 증상을 명확하게 알아야한다.

그것이 고집멸도 사성제 아니던가?

해서 우선 필자가 걸림이 되는 내용들을 쭉 나열한 것을 서두로 이 글을 시작하겠다.

 

===

 

<밑에 회색 네모에 현재 제가 걸림이 되는 내용들을 다 적어놨는데요.. 제 번뇌의 내용이니 이 회색칸은 넘기시고 회색 네모칸 아래의 글 부터 읽으시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 읽는게 걸림이 안되는 분이시라면 읽으셔도 상관이 없구요.>

나를 얕볼까봐
나를 무시할까봐
나를 욕할까봐
나를 비방할까봐
나를 시기할까봐
나를 질투할까봐
나를 뒷담화할까봐
나를 따돌릴까봐
나를 모자란다고 생각할까봐

나를 괴롭힐까봐
내 가족을 괴롭힐까봐
나를 해칠까봐
나를 죽일까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나를 해치는 사람들이
되려 내게 있는 좋은 것들을 뺏어갈까봐
내 금품을 뺏어갈까봐
내 지식을 뺏어갈까봐
내 지혜를 뺏어갈까봐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정보들을 내게 이익이라곤 하나도 안주고 나를 해치고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들이 내게서 배워갈까봐

나를 해치고 괴롭히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걸 엿듣고 좋은 정보나 지혜를 배워서는
내게 악행을 하면서 되려 나보다 잘 될까봐
그렇게 나보다 되려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지혜로워질까봐
본래는 불교를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불교를 알게될까봐
바로 위 문장 중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 불교를 알게되는건 괜찮지만
나를 괴롭히고 해치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되려 나로 인해서 내 말을 엿듣거나 내 기도소리를 엿듣고
불교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불교를 알게되서 큰 이익을 볼까봐

 

그래서 괴롭다.

 

근데 여기 써놓은 모든 내용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요소가 있다.

나와 상대.

 

하지만 색성향미촉법이 모두 가짜임을 안다면

상대는 없고

색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가 모두 가짜임을 안다면 나도 없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냄새맡아지고

혀로 맡이 나고

피부로 감촉이 느껴지고

의식으로 인식이 되는

모든 것들은 다 가짜이다.

 

가짜란 무엇인가

진실을 가리고 참됨을 가리고

숨기고 속이는 것이 가짜이다.

 

일체유위법 모두가 다 사실은 가짜이다.

나라고 생각했던 이 몸뚱이와 정신작용

즉 안이비설신의를 포함한 모든 연기하는 현상이 다 가짜인 것이다.

 

그 가짜를 범부 중생들은 형상과 이름으로 인식한다.

생각은 형상과 이름으로 구성되어있다.

형상과 이름이 가리키는건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다.

 

하지만 실상에는 이 같은 실체는 없다.

그럼 실상은 무엇이 있는가. 

연기법이 있다. 실상은 연기법이다.

실상에는 연기하는(=조건에 의존하여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연기하는 흐름. 연기하는 현상. 연기하는 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중생들은 연기법을 체득하지 못하여서 경계를 바라볼 때 실체적으로 바라본다.

형상과 이름으로 구성되어있는 생각이란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생각이 어리석음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설령 연기법을 지식적으로 안다 해도

연기법을 체득하지 못한 이상 필자처럼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위에 쓴 바와 같이 아주 많은 걸림들이 발생되는데, 

 

이런 걸림들은 사실 모두 실체시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앞서 말했듯 연기하는 흐름이오 현상이고 작용이다.

그리고 이 연기하는 현상 흐름 작용을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공부해야한다.

 

일즉다 다즉일이라던가 인드라망 같은 개념을 알아야한다.

 

해서 결론적으로 이 같은 연기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면

이 연기하는 현상에는 경계선이 없다. 구분선이 없다.

현재 한반도는 삼팔선을 경계로 남북이 나뉘어있지 않은가?

중생들은 강과 바다를 구분하고, 나무와 땅을 구분하고, 너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같은 사고들은 모두 생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생각은 형상과 이름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형상과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형상과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실체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실체는 그저 인간의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일 뿐이다.

상상의 산물일 뿐이며 망상일 뿐이다. 그러니깐........ 마치 페가수수나 해태나 세이렌이나 목이 세게 달린 용이나 개(케르베로스)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깐, 인간의 생각은 형상과 이름으로 구성되어있고,

이 형상과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은 위에서 말한 상상속의 동물들과 같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상속의 산물이고, 망상이고, 관념일 뿐이다.

 

(결국 판타지소설은 인간의 망상을 글로 풀어낸 글이 아니던가. 해리포터같은 것 역시 인간의 망상을 글과 동영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가짜라고 한거다. 인간의 생각을 구성하고 있는 형상과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은 사실은 없는것. 현실에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현실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현상이다. 연기하는 현상.

 

엄밀히 말해서 이 현상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있다는 것은 어떠한 실체(존재)가 있다는 말인데,

현상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현상은 없다고 해야 하는가 하면 사실 그것 역시 아니다.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있다. 하지만 현상에는 실체가 없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있다고 표현 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니

있다고도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연기하는) 현상, 작용, 흐름마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실상은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다.

 

이를 무실무허라고 한다.

 

이 무실무허가 실상이고 진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연기하는 현상을 중생들은 형상과 이름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실체적으로 바라본다.

다시 말해서 실체시 한다.

 

하지만 이는 옳바른 견해가 아님을 앞서 쭉 예기한 것이다.

 

그럼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그럼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란 무엇인가?

연기하는 현상을 연기하는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연기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체시와 연기시에 대한 개념을 필자는 민족사 출판사에서 출간된 용타스님의 저서 <생각이 길이다> 에서 배웠다. 좋은 책이다. 이 책과 더불어 중관사상과 반야사상을 공부하며 이 두 개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두 개념을 현실에서 응용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은 아잔브람 스님의 <성난 물소 길들이기> 및 <하루 일분 마음챙김> 그리고 월호스님의 <아바타라 안심이다> 라는 책이다. 이 책들도 참 좋은 책들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헌데 계속 반복해서 말하지만

중생들은 (연기하는) 현상을 형상과 이름으로 바라본다.

중생들은 현상을 실체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형상과 이름이란, 실체란 프레임을 씌워서 관찰이 가능한 모든 대상은 모두 진실이 아닌 거짓이다.

진짜가 아닌 가짜이다.

 

위에서 왜 필자가 가짜라는 표현을 썼는지 이해가 가는가?

 

그리고 다시금 말하지만 이 '가짜'는 진실을 못보게 속이는 것이다.

짝퉁 옷을 파는 상인이 진실하다면 이 옷은 짝퉁이라고 예기해줄 것이다. 그리고 값을 싸게 받겠지...

그러나 옷을 파는 상인이 진실하지 않다면 이 옷은 진품이라고 예기할 것이다. 

 

이와 같이 거짓과 가짜는 진실을 속인다. 진실을 못보게 한다.

 

집착이란 단어가 있다. 이 집착이란 말은 불교적으로는 앞서 말한 '실체시' 를 말한다.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바라보는 관점. 이것이 집착인 것이다.

 

그리고 자꾸 현상을 실체시하고 집착을 하게 되면

괴로움이 발생된다.

 

필자가 조금 생각해봤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현상은 그저 흐를 뿐이다.

돌맹이는 아무 말이 없다.

강물도 아무 말이 없다.

산도 아무 말이 없다.

달도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중생이 그 대상 경계에 의미부여를 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저마다 다 그 의미부여가 다르다.

 

이건 법륜스님 책에서 본 내용인데,

 

같은 달을 보고도

 

어떤 한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떤 한 사람은 슬퍼한다고 한다.

 

즐거워하는 사람은 즐거운 형상과 이름을 생각했을 것이고

슬퍼하는 사람은 먼저 떠나간 사랑했던 사람 등의 슬픈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슬픔을 일으키는 형상과 이름을 생각했을 것이다.(생각을 했거나, 생각이 일어났거나.) 그래서 슬픔이 일어난 것이리라.

 

이 말인 즉슨.

 

결국 있는 그대로의 실상인 연기하는 현상을

형상과 이름이란 색안경(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중생 자신이다.

 

그럼으로 결국 중생은 자신의 생각에 속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더구나 중생이 더 더 잘 속게끔 만드는 놈이 있다.

 

바로 탐욕이란 놈이다.

 

이 탐욕이란 놈 중 가장 센 놈이 두놈이 있다.

하나는 식이란 놈이고 다른 하나는 색이란 놈이다.

식색. 식욕과 색욕을 말한다. 

식욕이란 식탐을 말하고, 색욕이란 성욕을 말한다.

 

여하튼, 이 두명의 짱을 필두로 한 탐욕이란 놈들은

그 탐욕이 향하는 대상을 중생이 더 강하게 더 명료하게 실체로 바라보게끔 한다.

 

(함께 읽어보시면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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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중생들은 사실은 있지도 않은 환상들을 탐욕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은 사실은 있지도 않은 환상들을 실체시하고 탐욕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생들이 실체시(집착)하고 탐욕하는 대상들은 무엇이 있을까?

 

재색식명수 다섯가지를 들 수 있다.

 

오욕락이라 한다.

 

오욕락 = 재색식명수 이다.

 

재는 재물, 색은 이성, 식은 음식, 명은 명예, 수는 수면인걸로 알고있다.

 

이 탐욕이란 놈들은 욕망하는 대상을 더 강하게 실체시하게 만든다.

이 말 동의하는가? 자신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란 것을.

 

그럼으로 정리하자면 생각이 중생을 속이고, 탐욕이 중생을 속인다. 같은 이치에서 분노 역시 중생을 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속음의 근원에는 진리를 체득하지 못한 무명이 깔려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사실은 탐욕할 실체가 없으니 탐욕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같은 이치에서 분노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같은 이치에서 이 글의 서두에서 쓴 것과 같은 여러가지 걸림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탐욕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한다. 

온갖 걸림에 시달린다.

필자처럼 말이다.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떄문이다.

설령 지식적으로는 알지라도 체득이 안되면 걸림은 발생된다.

 

그러나 지식적으로라도 아는게 체득을 하는 과정선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꾸 지식적으로 아는 바를

새겨보고, 현실에 적용해보면서 필자는 괴로움이 사라진 경험이 종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식적으로나마 있는 그대로의 실상인 연기법을 알고서, 또 더더욱 자세히 연기법을 공부해가면서 동시에

더불어 자신에게 맞는 수행(염불, 독경, 참선, 절, 사마타, 위빠사나 등등등........)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교리)와 관(수행)을 닦아나감과 동시에

복도 많이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건 없이 지어야 할 것이다.

무주상보시 해야 할 것이다. 조건이 달린다는 것은 실체시를 기반으로 보시를 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조건을 붙이고 하는 보시. 이는 사견으로 한 보시다. 현실에는 실체가 없으니깐, 이는 자신이 만든 관념에게 보시를 한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라면 보리심을 내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혜를 닦는 것도 중요하다. 복을 닦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복혜쌍수라고 한다.

복혜쌍수는 부처님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부처님은 복과 지혜를 구족하신 양족존이시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보리심이 있어야 한다.

 

보리심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최고의 방법이 자신이 일체지자 무상사 조어장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내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겠다.> 라는 마음이다.

 

이 보리심을 내기 위해서는 보리도차제를 공부해야 한다. 필자가 읽어본 책은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순서> 라는 책이다. https://blog.naver.com/jikneo/223516877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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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관련 리뷰를 찾아보다가 그냥 눈에 띈 리뷰 하나를 올린다. (이 리뷰 내용은 안읽어보고 올립니다. 참고하시길..)

 

이 책은 경주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의 수업교재로도 활용된 책이다. 김성철 교수님이 이 책으로 수업을 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좋은 책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또한 참고로 필자의 블로그에도 보리심이란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대승불교 카테고리의 하위 항목에 위치해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해보시길 바랍니다.)

 

필자가 아는 바만 짧게 말씀드리자면 보리심을 내기 위해서는 일체중생이 단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가 과거생에 자신의 어머니였고 아버지였으며 형제 자매였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친척일 때도 조상님이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비심을 키우는 것 역시 필요하다. 자심은 자애심이오 비심은 연민심이다. 연민심은 자꾸만 생명을 방생하고 살리고자 하다보면 어느순간 문득 알게 될 것이다. 필자가 그러했다. 아 이것이 연민심이구나. 자애심은 사실 필자도 잘 모른다. 공부하고 있는 단계다. 자애명상에 대해서 찾아보시길 바란다. 필자 블로그 수행 카테고리의 하위 카테고리에 자애명상 카테고리가 있다. 그곳에 올려놓은 링크들에 관련 좋은 법문들이 있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기에 연기법을 깊이있게 이해해서 일체중생이 둘이 아님을, 하나임을, 일즉다다즉일이고 인드라망임을 이해하는 것 역시 보리심을 내는데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필자는 스스로가 아직 보리심을 발한 상태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종종 필자를 해치고 괴롭히려드는 원수들에게는 이타심이 안 일어날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고민하는 주제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것인가 이다. 바로 앞의 문단에 서술한 내용을 새겨보면 이타심이 일어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진정으로 이타심이 확실하게 일어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하루속히 불이법을 체득하고 동체대비심을 내고 싶다. 타인은 둘째치고 그러면 나 자신이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겠는가?)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와 같이 불교공부도, 수행도 꾸준히 해나가고, 보리심도 내기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며 점차적으로 공부도 수행도 깊어지고 보리심도 더욱 더 선명하게 들어나게 된다면 이것이 곧 향상일 것이고 성장일 것이다.

 

중생을 속이는 것은 중생 자신의 생각이고, 탐욕과 분노이다.

중생을 속이는 근본적인 것은 연기시가 아닌 실체시를 하게 만드는 근본 업장, 무명일 것이다. 생각도 어리석음이되, 이 무명이야말로 진정한 어리석음일 것이다. 이를 습기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이 무명, 탐욕, 분노를 깨부셔버리고, 언어와 형상으로 이뤄져있는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그리고 이와 같은 참된 자유와 행복의 성취를 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연기법적으로는 사실 한몸이라 할 수 있는 일체중생이 모두 함께 성취하기 위해서

 

불자는 공부도 수행도 하고 집착(실체시)에 기반한 바라는 마음이 없이 선업을 지으며 복과 공덕도 닦고, 보리심도 닦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어리석음. 탐욕. 분노.

어리석기 때문에 거짓이자 가짜로 구성되있는 생각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이 생각이란 색안경을 벗어던져버리자.

 

이 언어와 형상이란 것은 '개념' 이라 할 수 있다. 

(이 개념을 중관사상에서는 '희론' 이라고 한다.)

 

이 생각이란. 개념이란 색안경을 벗어던져버리자.

 

수행적으로서 말이다.

 

일상생활속에서 개념을 벗어던져버리면 개념없다고 욕을 먹거나, 경찰서에 가게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해서 수행적으로 이 생각(개념)이란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연기법이다.

 

필자는 불교공부를 하면서 이 연기법을 이렇게 관찰한다.

 

1. 무자성 공이다.

2. 일즉다다즉일 인드라망이자 한송이 허공의 꽃이다. 즉 동체이다. 한몸이다. 하지만 한몸이라 할 실체도 없고 한송이 꽃이라 할 실체도 없다. 그래서 한송이 '허공의 꽃' 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연기법과 공이(공은 연기법의 다른 이름이다.) 체득이 안되었더라도

자꾸 이 같은 내용대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것도 반야바라밀이다.

 

https://blog.naver.com/tenzinpalden?Redirect=Log&logNo=223770224908&from=postView&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공[空]을 익히는 두가지 방법!!! 반야바라밀을 닦는 법은 무엇인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닦는다라는 것은 공[空]을 익히는 것을 말합니다. 공[空]을 익히는 방법은 두가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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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무척 좋은 법문입니다. 저는 이 법문을 통해 반야바라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해서 금강경의 가르침과 같이.

그리고 필자가 앞서 마한 1,2번의 내용과 같이 세상을 관해보자.

 

동체라고. 현상적으로 한몸이라고. 그리고 그 본질은 텅 비어있다고. (실체가 없다고.) 그래서 이름 붙일 '것'도 사실은 없다고. 그래서 꿈같고 환상같고 그림자같다고. 한송이 허공의 꽃이라고. 그 현상만 볼 떄는 일즉다 다즉일이오, 인드라망이라고.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하나는 모두와, 모두는 하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이 세상에 연결 안된 것은 없다고. 

 

인연생기하는 현상들 일체 모두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해설 : 꿈도 환상도 물거품도 그림자도 경계선이 없죠? 구분선이 없고? 이 같은 것들은 실체가 아닌 현상이라고 명확하게 인지도 되죠? 이게 무실무허입니다. 이게 실상입니다.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만 그런게 아니라 세상 만사 삼라만상 두두물물 일체중생 모든 것이 다 사실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다는 것입니다.)

모든 형상과 이름은 (= 모든 생각은 = 모든 개념은) 실체가 없으니, 보든 형상과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에는 이름을 붙일만한 실체가 없다고. 이와 같이 보면 부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색성향미촉법이란 것도 결국 글자이고 언어이고 개념이니까. 이 같은 언어(나 형상) 가 지칭하는 것은 실체이기 때문에 언어나 형상은 실상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언어로 부처님을 찾으려 하면 그런 사람은 바른 길이 아닌 삿된 길을 것는 것이니, 그런 자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필자도 이런 식으로 세상이 안보여서, 다시금 또 되새겨보려고 이렇게 글로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금강경은 깨달으신 분. 즉 부처님의 시선을 글로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저와 같은 일반 범부 중생의 시각으로는 당연히 이해가 안되죠. 그러니 자꾸 독송해야 하는 겁니다. 금강경 법문을 하시는 김원수법사님 법문에서 들은 예긴데, 동양의 경전은 이해를 한 뒤 읽으려 하는게 바른 순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김원수 법사님은 동양의 경전은 이해가 안가도 자꾸 읽는 것이 곧 공부(수행)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깨달은 자의 견해를 얻으려 하는데 어찌 그 견해를 얻은 뒤에서야 책을 읽는게 바른 순서겠습니까? 자꾸 깨달은 자의 견해를 반복해서 독송하고 또 배우고 연구하고 새기다보면 점차적으로 그 견해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져가는 것이 순서일 테지요.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해서 연기법을, 이런 관점을 체득하게 될 때 형상과 언어란 가짜에 끄달리지 않고 속지 않게 됨으로서

 

이 글의 서두에 줄줄히 나열한 여러가지 걸림을 저는(필자는)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합니다.

 

결국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걸림들은 모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깔려있는 것이니까 말이죠.

 

저는 이 4상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아상 =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관념=망상=생각)

인상 = 타인들을 비롯한 인간이란 실체가 있다는 견해(=관념=망상=생각)

중생상 = 중생이란 실체가 있다는 견해 (=관념=망상=생각)

수자상 = 목슴이란 실체가 있다는 견해 (=관념=망상=생각)

 

이 4상을 비롯하여 반야심경과 금강경에서는 지혜, 얻을 것, 무명, 무명이 다함, 고집멸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등에 대한 집착도 깨부셔주는 가르침들이 등장합니다. 

 

이 가르침들을 체득했다면 저는 서두에 작성한 걸림이 없었어야겠죠.

하지만 서두에 쓴 내용들이 걸림이 되서.

그래서 이렇게 연기법과 공에 대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며 다시금 새겨본 것입니다.

이 내용 새기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어쨌든..... 금강경 4상및 금강경에 나오는 용어들에 대한 더 자세한 풀이는 아래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jejupogyosa/MFGh/68 

 

금강경 오가해 주석 모음

금강경 오가해 주석 모음 가행(加行) 힘을 더하여 마음과 계행(戒行)을 닦는 일. 방편이라고도 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일정기간을 정해 놓고 평상시보다 더욱 정진함을 이른다) 간탐심( 貪心)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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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불법승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광명진언)

옴마니반메훔(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