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어딜가나 피할 수 없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14. 13:04

이를 느꼈다.

법회를 가면 요즘 스님이 항상 해주시는 법문이

불교는 마음법이고 인연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내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피하고자해도 마음이 괴로운 상황은 모습만 바꿔서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어제 느꼈다.

심리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은 미해결된 과제(상처)는 계속해서 현실에서 그 미해결된 상처가 투영되서 보인다.

결국 이 이치로 인해

내 마음이 바뀌지 못해서
같은 상황에서도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고 그 상황이 걸림이 되는 이상 같은 상황은 계속해서 마주칠 수 밖에 없음을 직접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경험하기도 했거니와, 어제와같이 피해도 피할 수 없고 다른 형태로 같은 걸림이 발생되게 됨을 경험했다.

결국 내가 해탈해야된다.

생각이 없어야된다. 집착을 놔야된다. 머무르지 않아야된다. 현상은 연기하는것으로 있는그대로 알고, 그 현상엔 자아나 타자라 할 실체는 없음을 알아야된다.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적 관념, 실체시, 집착, 생각, 분별망상은 말그대로 진실된 견해 바른견해 사실이 아닌

연기법이 체득안되고 머리로조차도 이해하지못하고 삼법인과 연기법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아 발생되는 착각이고 망상일 뿐이고 사견일 뿐이다. 진실을 있는그대로 보지 못하고 착각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연기하는 제법에는 자아가 없다.
근데 제법에는 자아를 비롯한 실체가 없다.
일체제법엔 실체가 없다.

고로 이분법적 관념들도 사실 착각일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개념 명칭 이름 관념들 모두가 실체적인 것이니깐. 언어는 항상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해서 언어를 중관학에선 희론이라 한다.)

고로 이제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나쁘고의 실체시에서 벗어날때다.

이런 생각 자체가 없으니 어제 비로서 편해짐을 경험했다.

이 경험을 지속적으로 되새기며 (생각이 곧 번뇌이니,) 좋다 나쁘다 더럽다 깨끗하다 나 너 우월 열등등의 (실체적 성질을 지닌 관념 즉) 생각 자체를 안해버리면 편할 것 같다.

생각 자체를 하지 말자. (제행무상 제법무아 제법공상을 사유하고 모든게 연기한 것임을 사유하며 생각이 실체시라는 사견이고 번뇌이고 망상이며 착각임을 알자.)

그냥 연기속엔 자아도 없고 실체가 없다는,
연기는 있되, 실체는 없다는 걸 늘 새기고,
연기와 삼법인과 팔정도 등 부처님 가르침을 사유하면서 수행적으로 살아가자.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리라.

마치 같난아이가 세상을 바라볼 때 이름 붙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려면 분별을 해야하지만) 수행에 있어서는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의 현실인 연기법과 삼법인 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해서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자.

https://m.cafe.daum.net/pali-study/8Xy1/1591?svc=cafeapp

우다나 바히야경, 일체와 아라한

내외입처 일체가 법에서 중요함을 환기시키는 우다나 경문입니다."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바히야는 붓다께서 탁발하는 길을 막고서 막무가내로 법을 설해달라고 청했다.붓다는 길거

m.cafe.daum.net


이 바히야 경의 가르침과 같이 말이다.

“바히야여,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그대가 없다.
거기에 그대가 없을 때,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그 둘 사이의 어떤 세상도 없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 석가모니 부처님 -


연기가 있을 뿐 자아는 없다.
자아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연기하는 현상에는 이런 실체는 없다.
연기가 있을 뿐 실체(자아)는 없다.

이를 위의 부처님 가르침으로서
분별 생각 판단 관념을 붙이지 않고서
그저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면
거기에 관념 생각은 없다.

(관념 생각이란 희론이다. 희론은 연기라는 진실속엔 존재하지 않는 항상성을 가진다. 즉 언어 문자 개념 생각 희론은 연기법 삼법인 공의 이치와 반대되는, 실체적인 속성을 가진 어리석음이 빚어낸 상상속의 산물이며, 중생의 망상이자 착각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견이며 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착각해서 보는 착각이고 사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로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허망한 있지도 않은 자아관념, 실체시는 없이 연기하는 현상만이 있으니

연기가 있고 자아(실체)는 없다는 실상인 제법무아를 관하는 수행이 되고,

이 수행으로서 모든 희론 분별이 사라질 때 고통의 소멸이 있게 되는 듯 하다.

(바히야경에 대한 필자의 해석입니다. 물론 저도 연기법 삼법인을 체득 못했고 탐진치 삼독심에 끄달리기도 하는 범부중생인지라 필자인 제 해석에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신 분께서는 댓글로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글은 수행적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분별을 하지 않고서는 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해석하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 물론 분별을 하는 것도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법규와 윤리도덕을 잘 지키고 효도하고 오계를 지키며 살아간다면 그것도 괜찮겠지만 수행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반야 공을 아는 지혜로서 원융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늘 현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그 긍정적인 해석을 다른 이들에게도 말해주는 것이 자리이타의 길이며 지혜로움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 글의 결론은

어딜가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상은 말이다.
그러나 같은 현상을 마주하더라도
내 마음이 바뀌거나
내가 지혜로워져서(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견을 갖게 되어서)
그와 같은 상황을 전과 같이 경험하더라도 더 이상 괴로움이 생기지 않을 수는 있다.

즉 인지행동치료나 신념찾기와 같은 심리적 치료로 비합리적 신념을 건강한 신념으로 대체하게 되었거나

연기법과 삼법인을 일상에 적용하여서, 예전엔 보이는 것을 실체적 관념을 씌워서 사견으로 바라봤지만 이제는 거기에 생각(희론)을 붙이지 않고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전과 같은 경계를 마주하고
전과 같은 상황을 경험하더라도
예전과는 달리 정신적인 괴로움이 발생되지는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이다.



불법승 삼보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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