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에는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근데 이 심신만 연기하는게 아니라
일체유위법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모두 연기하는 것인지라
사실 이 모든것이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현상이 그 뜻에 맞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서(대개 아니다.) 결국 괴로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현상의 변화의 원인(인연,조건들)이란
일체다.
법계의 실상은 일즉다 다즉일 중중무진법계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 직접적 원인(인)과 간접적 원인(연)을 나눠보자면
인은 나의 신구의 삼업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근원은 나의 의업이다.
그러니 마음 잘쓰자.
밖을 바꾸려하면 그건 내가 아니기때문에 잘 안바뀐다.
심신을 바꾸려해도 그건 내가 아니기때문에 바뀔 때도 있고 안바뀔 때도 있지만, 욕심으로 변화시키려하면 잘 안된다.
그러니 지혜로운 방법은
알아차리기. 수행하기. 불교공부하기. 이것이다.
일단 호흡을 관찰하는거다.
사념처중 신념처를 실시하는거다.
이것이다.
그리고 날 화나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즉 원증회고를 겪고있다면.
이 육신도 내가 아닌지라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심장 뛰는걸 내 뜻대로 조정이 가능한가? 대소변을 보고싶어서 보는가? 졸음은 내가 오라하지도 않았는데 온다. 병들고싶지 않고 늙고싶지 않고 죽고싶지 않은데 병들고 늙고 죽는다. 이 육신은 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육신은 인연생기한 것이다. 고로 이 육신은 조건에 의존하여 형성되고 변화하다 흩어진다. 인연따라 이합집산하는 것이다. 그러한 육신에 '나' 라고 이름붙일만한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 이는 수상행식또한 마찬가지다. 정신작용도 모두 인연생기하는 것이다. 느낌 생각 감정도 모두 조건에 의존해 일어나는 무상하고 자성이 없는 것이다.) 외부경계가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라고 생각하라.
이 육신도 내가 아니어서 내 마음대로 안되듯,
외부경계도 내가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다.
진짜 나라면 내 의도대로 척척 움직여야하고 거기엔 걸림이나 장애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없는데 내 것이라 할건 또 어딨겠는가. 이 사실을 알자.
하여 내가 아니기에 (인연생기하니 인연에 의지해서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이니)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당연함을 알자. 알고서 받아들이자.
그리고 그 '내'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닌 것은 내버려두자. 될때로 될 것이다. 관여하지 말자. 상관하지 말자. 니 알아서 하라 하고 내버려두자. 그리고 관심 꺼버리자.
그럼 내가 할건 무엇인가?
일단 최저의 마지노선은 오계를 지키는것이다. 살생 투도 성범죄 거짓말이나 욕설 그리고 중독성물질에 취하는것 아니면 일단 최소한의 기본 도리는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효도하고 자리이타 자각각타의 범주에 속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근데 사실 이 역시 뜻대로 안될 때도 있을것이다. 그 행위를 하는건 이 오온으로 구성된 심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하는가. 어떻게하긴. 바라는 바 없이 하면된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천번을 실패했다. 프로가 되려면 천번은 실패하고 져봐야 되는 것이다. 그 이상 패배하고 실수하고 실패해봐야 할 수도 있으리라.
근데 그래도 괜찮다.
다른사람들한테 피해주거나 방해되는거 아니면. 나만 신경쓰면 된다. 법당의 기둥처럼 묵묵히 내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
그리고 바라는바가 없으면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한 원인을 분석해서 인연을 조정해서 다시 시도하면 된다. 될 때까지 말이다. 이것이 서원이다. 이것이 발원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하다보면 결국 법계의 본질에 부합하며 자신의 참된 본성에 부합하는 자리이타적이며 자각각타적인 원들은 성취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원들을 이루는 것 역시 내가 아닌 부처님이 행하시는 일 같다. 나는 부처님 시봉을 한다는 마인드를 갖고, 아상을 버리며 겸손하고 감사하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는 하심을 하고 부처님 시봉 한다 생각하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을 법화경의 상불경보살님처럼 공경하는 것이 또 좋은 수행법 같다.)
그렇게 오온이 연기하기에 거기엔 나라 할 실체, 내지 색수상행식이라 할만한 실체도 없음을 알고.
이 육신을 비롯하여 인연따라 이합집산하는 일체유위법이 내가 아님을 알고.
그 인연생기하는 일체의 경계가 내가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 즉 내 욕심대로, 아상에서 기인한 갈애와 집착과 취착과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내가 할건
첫째. 들숨 날숨 호흡 관찰하기(사념처중 신념처 수행)
둘째. 오계란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기
셋째. 효도와 자리이타 자각각타의 서원을 세우고 바라는 바 없이 원을 성취하고자 정진하기. 끊임없이 굳세게 지속적으로 나아가기. (낙숫물은 바위를 뚫는다.)
넷째. 내 육신의 감각이나 정신작용으로 일어나는 경계는 연기하는 것인지라 내가 아님으로 조건따라 생멸변화하는 것임을 알고 내버려두고 관여하지않고 다만 마음 주의가 그곳으로 갔다면 알아차린 뒤, 그 경계를 바꾸거나 없애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다만 알아차린 뒤 첫째, 둘째, 셋째에 쓴 할일로 돌아오기.
즉 나라고 할 수 없는 인연따라 인연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인 경계를 알아차린 뒤, 다시금 첫번째에 쓴 수행(수식관, 염불, 독경, 참선, 주력, 절, 봉사 등) 이나, 둘째에 쓴 계를 지키는 행위나, 셋째에 쓴 보살도를 걸어나가기. 이렇게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의 정정진을 해나가기 이다.
그리고 그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자각각타라 할 수 있는 보살의 여정(보살도)의 목표지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취. 즉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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