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글법문이 올라오는 곳.
목탁소리 사이트다.
그곳에는 글 법문과 더불어 사진들이 올라온다.
그런데 여기 올라오는 사진들을 볼 때 저절로 부처님이 생각난다.
그래서 이 사진들을 볼 때면 요즘 나는 종종 합장을 하고 나부 불법승 하고 삼보에 귀의를 하게 된다.
사진속 풍경은 자연물이고 동식물이다. 헌데 그런 풍경사진에서 부처님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아닐수도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한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상은 형상과 언어(이름)을 말한다. 인간의 생각은 모두 형상과 언어로 이뤄져있는데
이 형상과 언어가 지칭하는 것은 실체이다.
이 실체는 실상엔 없는 상상속의 산물일 뿐이다.
왜냐하면 실체는 항상성이란 특성과 독자성이란 특성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정불변하고 독자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특성을 지니는 것이 실체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체는 현실에는 없다.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현상(흐름,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 같은 언어와 형상이 지칭하는 실체는 그저 관념일 뿐이다.
그래서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육근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은 다 실체가 없으니,
모든 형상(이름)이 지칭하는 대상들에 이름을 붙일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대상들을 실체가 아닌 현상으로 보면
곧 부처님(여래)을 보게 된다는 것이 이 사구게의 해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같은 실상과는 다르게 중생들은 형상과 언어로 구성된 생각을 실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이 같은 생각을 실체시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되는 바른 견해는 연기시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리고 이 실체시를 기반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떠할까?
사진을 찍는데 찍히는 사람과 그 주변의 배경이 각각 별개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체적으로서 발이다.
하지만 범소유상 개시허망임을 알아서 약견제상비상이란 관점 - 다시말해 연기시라는 관점으로 사진을 찍고자 할 떄는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풍경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서 찍을 것이다. 더불어 사진을 찍는 사람과 찍히는 대상 역시 둘이 아님을 알고 찍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사진에 찍히는 대상도. 카메라에 나오는 화면도. 모두 실체가 없는 하나의 현상임을 바로보면서 찍을 것이다. 해서 각각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모든 것이 결국 마음의 나툼이오 부처님의 나툼이라고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것이다.
더불어 해석과 판단을 붙이지 않고 사진을 찍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하고 변화하는 인연생기하는 일체의 현상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만한 대상(알갱이)도 없기 때문이다. 해서 이름 붙이지 않고 그저 카메라 안에 담기는 풍경을 구분짓고 차별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연결된 현상임을 자각하면서 그 '하나의 현상' 을 촬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카메라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두두물물의 사물과 대상들이 각각 별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닌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하나의 현상에는 이름을 붙일 실체가 없기에 판단 해석을 하지 않고 그저 실체가 없는. 실체가 없기에 공한 그 현상을 찰칵 하고 찍으면... 그 사진이 결국 부처님을 찍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어제 이 같은 답을 찾았다.
물론 이것이 목탁소리 사이트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찍는 방법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찍는 사진이 목탁소리에 올라오는 사진들과 같은 사진을 찍는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제목과 같다. 대답은 이미 그 물음 속에 있다는 것.
(아 이 문장은 내가 만든 문장이 아니다. 불교경전 불경 독경이란 어플에서 때때로 내게 불경구절을 한줄식 알림을 보내주는 데 어제 받은 알림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장이다. 이 문장 뒤에는 - 환오 - 라고 적혀있었다. 환오가 불경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의문을 내니 시절인연이 딱 갖춰졌을 때 그 답이 문득 떠오르는 것 같다.
그 답을 빨리 찾고자 한다면 보다 열심히 정진하면 될 것이다.
복혜를 동시에 닦으며
집착없이 열심히 계정혜 삼학을 닦아나가다보면
그럼 답이 어느 순간엔가 문득 떠오르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모든 현상은 하나의 특성만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항상 모든 측면의 부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원융삼제이며 십계호구이며 일념즉시무량겁이기 때문에 그런 듯 하다.
+ 참고로 내가 이 같은 통찰을 결정적으로 얻게 된 조건이 된 사진은 이 글법문에 나오는 사진이다.
https://moktaksori.kr/Writing-1/?bmode=view&idx=13466732
[하루하루 명상언어] 2011.10.16 (1) : 법상스님글모음
즐거움은 선업을 받는 것이니 좋고, 괴로움은 악업을 녹이는 것이니 좋다. 깊게 바라보면, 언제나 우리 삶에는 좋은 일들만 일어난다. 2011.10.16 글쓴이:법상
moktaksori.kr
이상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불법승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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