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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삼무차별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3. 31. 20:04

아는 한 선생님의 카톡 프로필에 시삼무차별에 대한 경구와 그 해설이 적혀있었다.

예전에 얼핏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한데......

눈길이 가고 관심이 가서 인터넷에 찾아보았다.

부처님과 중생과 마음은 무차별이라는 내용......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하나다.)

 

아는 선생님의 프로필에 적힌 시삼무차별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물과 얼음과 구름이 하나듯.

 

아. 

 

이걸 보고 정토경전대학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현재 나는 정토불교대학을 다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토경전대학은 정토불교대학을 마치고 곧장 등록을 할까 그냥 후일 여유가 있을 때 하거나..... 그런 식으로 할 까.

이런 생각을 최근에 했었는데. 다니고 싶어졌다.

(이 시삼무차별에 대한 가르침은 정토경전대학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리고 이는 무상의 이치를 새겨보면 당연히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모든 것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이것은 무상의 이치를 삶에서 체감하며 세운 나의 지론이다.

이 지론을 처음 세운 때는 약 4-5년 전. 시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하루아침에 별세를 한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이미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사건으로 인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매우 갑작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새로운 갑작스러운 소식을 연달아 접하니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언제죽을지 모른다. 원래 인생은, 세상일은 너무나도 갑작스럽다. 죽음이란 놈은 예상이 불가능하다. 하루 뒤는 커녕 한시간 뒤. 아니 오분 뒤. 아니 일분 뒤. 아니 한치앞조차 알 수 없는 게 세상사고 인생이다.

 

고로 뭐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지혜이다.

 

필자는 이 때 당시 이 지론을 세우고

 

당시 필자에게 걸림이 되는 수준의 보시를 과감히 단행했다.

재보시가 아닌 법보시였다. 

 

(그렇게 한발 나아가니 같은 수준의 법보시를 다음에 다시 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나아가다보니 그 당해인가 다음해에. 즉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몇개월 뒤엔 비심이 무엇인지 경험으로서 알게되었고, 그 다음엔 일체중생이 모두 과거생 어머니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엔 불교공부를 조금식 더 해가면서 중관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더불어 천태교관을 공부하게 되었다. 연기법의 중요성을 알게되었고 세상일은 어째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를 연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금강경 독송을 어머니가 아픈 시점부터 해서 어머니로 인하여 금강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후 꾸준히 금강경 독송을 해오다보니 최근에 들어서야 금강경의 독송 효과를 조금식 체감하기 시작했다. 보다 집착이 옅어진다랄까? 보다 더 형상과 언어로 구성된 생각이 적어진다랄까? 여하튼 필자는 이렇게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쨌든......

 

해서 무상의 이치로 볼 때도 사실 정토경전대학을 들을 수 있을 때 신청해서 듣는것이 이익일 것이다. 그것이 최고로 지혜일 것이다.

 

법상스님 역시 이런 가르침을 주신다. 다음 글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꼭.

 

https://moktaksori.kr/Writing-1/?idx=141266728&bmode=view

 

[부처님말씀] 선법을 닦지 못할 때가 있다 : 법상스님글모음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물에 떠내려 가면작은 선도 닦아 익힐 틈이 없는 것 처럼,중생도 또한 그러하여거친 번뇌의 흐름에 떠내려 가다 보면선법을 닦아 익히지 못한다.[열반경]그나마 지금 이렇

moktaksori.kr

 

여하튼 무상의 지혜로 볼 때도 그렇지만,

 

이를 생각지 않고 있을 때 이분 선생님의 카톡 프로필을 보고 정토경전대학도 바로 등록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카톡 프로필에 경구를 올려놓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자리이타적인 일 말이다.)

 

어쨌든 이 시삼무차별...........

 

참 와닿는 법문이다.

 

이 가르침은 찾아보니 화엄경을 비롯해 여러 경전에 담겨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나온다.

이 시삼무차별의 가르침, 시삼무차별의 진리에 따르자면

 

이 시삼무차별의 가르침과 그 해설을 카톡 프로필에 올려놓으신 선생님 역시 부처님일 것이다.

부처님과 차이 없고, 마음과 차이 없을 것이다. 

 

그래. 모든 중생이 부처님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모든 중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 고차원적인 관점을 제하더라도.

 

단순히 시공간을 두고 설명하는 3차원적으로만 보더라도

 

사실 일체중생은 서로간에 모두가 모두와. 하나는 모두와. 모두는 하나와. 서로간에 연결되있음을

자세히 관찰한다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법륜스님 역시 공간적으로도 모두 연결되어있다고 법문해주셨다.)

 

그래.. 법화경에는 상불경보살님이 나오신다.

 

나는 법화경을 잘 모르지만,

 

한 스님께 상불경보살님에 대한 소참법문을 들은 적이 있다.

 

상불경보살님은 만나는 모든 생명을 예배하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그 생명들 모두는 성불할 생명들이라는 이유로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7205)

 

이진두/ 상불경 보살 - 불교신문

저 먼 겁 중에 한 보살비구가 있었는데 이름을 상불경(常不輕)이라 했다. 상불경은 어떤 사람이든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예배하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은 깊이 공경하나

www.ibulgyo.com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친하고 원수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부처님이며

앞으로 만날 모든 사람들 모든 생명들 역시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밝은 기분이 든다.

 

일체중생 모두가 사실은 부처님이고,

 

이 일체중생 아니 일체 모든 부처님으로 인하여

 

나는 향상해나가고, 불법을 닦아나갈 수 있으며,

그렇게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부처님이 맞는 것 같다. 친원을 가리지 않고 지금껏 내가 만났던 모든 이들이 말이다..

 

필자의 한 스승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부처님은 모두 몇분이실까요? 라는 질문을 던지신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스승님께서는 말씀해주셨다.

 

 

'중생의 수 = 부처님의 수' 지요.

 

 

지금껏 만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스승님들께

부모님께

가족분들에게 

친척분들에게

조상님들께

일체중생에게

일체모든 존귀하신 부처님들께

 

귀의합니다.

 

나무 시방삼세일체제불

나무 시방삼세일체존법

나무 시방삼세일체존승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