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불교의 중흥은 조건형성에 달렸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4. 12. 13:45

현 동국대 총장 윤재웅총장의 법보신문 인터뷰를 보았다.

그 내용이 아주 좋다.

현 동국대 운영 아주 잘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화경에는 나온다. 애기들이 모래로 부처님 형상을 만들기만 해도 그 조건으로 인하여 결국 그 애기는 훗날 성불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처님을 그리기만 해도. 불상을 만들거나 불탑을 만들기만해도. 결국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연기법이다.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이 현상. 즉 중생들이 삼라만상이라 부르는 범주 안의 일체의 세간사이다. 일체 세간사 흥망성쇠는 모두 조건 형성에 의해 일어나고 소멸한다.

일어날 조건이 형성되면 일어나고, 유지될 조건이 형성되면 유지되고,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끔 조건이 다하여 흩어지면 현상 역시 흩어져버린다. 그렇게 현상은 이합집산한다. 그리고 그 현상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생이나 사라 할 것이 아닌 다만 변화할 뿐이며, 또한 그 현상의 본질을 살펴봤을때는 현상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고 부증불감이며 불래불거이다.

 

여하튼.... 이같은 인연생기법으로 구성된 이 세상, 이 세계에서 결국 새로운 불자들을 늘리고, 기존 불자들의 수준을 높이려면 결국 조건 형성이 중요할 것이다. 기존 불자들의 수준을 높이려면 가르치는 스승들의 도력이 높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런데 새로운 불자들을 늘리는 것은 이 역시 조건형성일 것이고, 그 조건이란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불교를 접하게 해주고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한 조건이 되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불교. 너무 좋다. 너무 좋은 가르침이고 너무 좋은 종교이다. 종교라 할 만한 것은 사실 불교뿐이다. 종자는 마루종자이니. 기독교는 릴리전이란 영단어에는 해당할 지 모르지만 종교라는 말에 부합하는 가르침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티벳에서 불교를 배운 뒤 방편으로서 당시 서양 유럽지역의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신약성경을 설한 것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도마볶음도 그렇고 말이다.) 하여튼 불교는 이 같이 너무 좋다.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보면 참 좋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불교가 좋다 해서 너도 나도 불자가 되려고 자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불교가 좋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일단 경험해보고 가르침을 들어보게끔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더 기초적으로는 불자가 아니라도 한번이라도 절에 가서 부처님오신날에 관불의식을 해보고, 부처님한테 꽃공양 올려보고, 불자는 아니어도 나무아미타불 한마디 해보는 것. 그것이 참 중요한 조건형성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한 군법사 스님께 이 같은 가르침을 들었었다. 어린 애기들에게 어머니들이 돈을 쥐어주고 불전함에 넣게끔 하는 교육은 아주 아주 훌륭한 교육이라고. 이 역시 연기법적으로 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크게 보았을 때는 성불의 인연을 심어주는 것이오, 작게 보았을 때는 이 같은 조건을 형성해주는 교육으로서 아이는 불교를 경험해보고 불교를 체험해보는 것이다.

 

그럼 향을 싼 종이에는 향내음이 베는 것처럼. 결국 그렇게 불교를 경험하고 조금식 접해가며 불교가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 동국대의 전법포교는 아주 훌륭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학부시절 몇번의 장학을 받으며 신행활동을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가 그 활동들을 하면서 들은 법문들, 그리고 연등권선이나 봉사나 경주 성지순례 등의 신행활동이 필자의 향상에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일 것이다. 장학금도 받고, 법문을 듣고 신행활동도 하고. 장학금은 장학금이고 그보다도 그렇게 신행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부처님 법도 배우고, 신행활동도 해봄으로서 향을 싼 종이와 같이 될 것이다. 거기서 부처님 가르침 한문장이라도 듣고, 이를 사유해보고, 이를 삶에 적용해봄으로서 조금의 진전이라도 이룰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좋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불교가 참 좋은 가르침임을, 훌륭한 가르침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해서 필자는 현 동국대 전법포교가 아주 훌륭하게 잘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현 윤재웅 총장은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다. 불교교육은 조건형성이라고. 아주 지혜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조금 더 분석해보자면. 중생들이 나 너 수명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현상들은 사실 모두 무아고 무자성이고 공이다. 모두가 연기하기 때문이다. 이것들. 모두 사실 일체유위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 같이 일체현상은 연기하기 때문에 실상은 인드라망, 일즉다다즉일, 시삼무차별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이치에서 불교의 중흥도, 일체중생의 성불도 그렇거니와, 일체의 세간사 흥망성쇠가 모두 결국 조건에 의존하여 이뤄진다. 그럼으로 세상 사람들이 판단 없이 법문을 듣고, 판단 없이 불교를 경험할 수 있게끔 여러가지 조건이 조성된다면 이로 인하여 불교는 중흥하고 보다 빠르고 원만하게 일체중생이 무생법인을 성취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며 성불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앞서 말했듯 판단하지 않고 법문을 들어보고, 판단하지 않고 불교를 경험하게끔 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판단은 실체시에 기반해 있으니, 판단은 곧 무명 실체시를 기반으로 한 집착에서 기인한 생각일 테니 말이다.

이 같은 생각의 구성물은 중관학적으론 희론이오, 교리적으로는 언어와 형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금강경에서는 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생각의 구성물인 언어와 형상이 지칭하는 것은 실상인 연기법과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이치와는 상반되는 고정불변하고 독자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다. 이 실체는 현실에는 없는 것이다. 즉 상상속의 산물일 뿐이다. 그럼으로 이 같은 실체는 관념일 뿐이다. 망상일 뿐이다. 허구일 뿐이고 가짜일 뿐이다.

 

이 같은 허구 가짜인 관념의 색안경을 쓰고서 불교를 접하지 않고서

중생들이 판단없이 그저 법문을 듣게끔 해주고 불교를 경험할 수 있게끔 해 줘야 한다.

그럼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머리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가슴으로. 참된 본래면목이 감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본성이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바로 고향을 말이다.

 

많은 물들이 각기 흩어져있더라도,

결국 만류귀종이다.

결국 바다에서는 하나가 된다.

접시에 담긴 물. 그릇에 담긴 물.

페트병에 담긴 물.

 

결국 바다에서는 하나다.

 

그 본래 하나인, 그리고 본래 하나라 할 만한 실체도 없는 그 물들이

각기 각기 각자의 그릇속에 담겨있다.

그 그릇이 바로 중생의 무명이오 실체시이고 집착이고 생각일 것이다.

그 삼독심의 그릇, 그 업장의 그릇, 그 집착 분별 망상 관념의 그릇. 

그 그릇을 깨주는 가르침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그럼으로 중생들이 판단없이 불교를 접하고 듣고 보고 경험하게끔 해주려면

어찌해야할까. 이는 스님들, 그리고 불교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부대중이 고민해봐야 할 일일 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스님들, 불교학자분들, 법사님들이 공부와 수행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명상도 많이 배우셔야 할 것이다. 하여 중생들이 판단없이 지금 여기의,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과거의 마음도 아니고 미래의 마음도 아니고 타인의 마음도 아닌 '자신의 마음' 을 판단 없이 바라볼 수 있게끔  하는 법문을 펼치고, 중생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주셔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시는 욕심을 없애고, 인욕은 화를 없애고, 선행은 어리석음을 멀어지게 하고 지혜를 증장시킨다고 한다. 

(다음 글을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인과경 111. 빨리 열반을 성취하는 방법.

그때에 세존은 비구들과 한량없는 하늘들에게 둘러싸여 왕사성에 들어가셨는데, 여래께서 문지방을 밟으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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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으로 중생들이 보시를 할 수 있는 인연을 형성해주시고, 인욕을 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시고, 선행을 할 수 있게끔 인연을 형성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불교의 중흥은 조건형성에 달려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재가불자의 양성뿐만이 아닌 훌륭한 출가 수행장를 양성하는 것 역시 조건형성에 달려있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보라. 경찰대학교를 보라. 그들이 하는 교육을 보라.
공부의 왕도를 봐보라. 전교1등을 하고 서울대를 간 학생들이 자신의 공부법을 소개하는 교육영상들을 봐보라.

이것들을 봐보면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이 조건형성이라는 것을.

 

해서 교육자는 많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연기법을 많이 공부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공성을 많이 공부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보리심을 내기 위해 보리심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고 사유하고 또 보리심은 어떻게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가져야 할 것이다. 의문 속에 답이 있으니 말이다. 초발심시변정각의 이치가 이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생각으로 구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두고 열심히 계정혜 삼학을 닦아나가다보면 어느날 문득 그 답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교학적 교리적으로는 다 알더라도, 불교 교육자는 많은 불교 교육 프로그램들 및 여타 다른 교육 프로그램들을 경험해보고 들어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수업도 들어봐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좋은 건 취하고 나쁜건 쳐내면서 좋은것만 모으고 모으며 보다 훌륭한 교육방식을, 수업방식을, 포교방식을, 전법방식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정정진 아니겠는가. 이것이 인연관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자는 집착을 해선 안될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

 

해서 스님들 및 불교학자분들, 법사님들은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냥 상도 그렇지만 법상에도 비법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색과 공의 관계성을 명확히 이해해서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아야 할 것이며,

 

상에도 그렇지만 법상에도 집착해선 안될 것이다.

 

이 상이 없다면 타종교인들과 싸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생각이 다르고 집착하는 바가 다르다라고 생각하면 될 뿐인 것 아니겠는가.

물론 본질적 차원에서는 그 생각은 희론이오 집착할 바는 본래 없지만 말이다.

현상적으로 볼 때는 그냥 서로 생각이 다르구나 라고 이해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될 일일 것이다.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아 너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리고 전법 포교에 있어서는 집착없이 전법 포교를 행해야 할 것이다.

무유정법이지 않은가.

 

반드시 라는 것은 없다.

 

'반드시 ~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일으킨다. 

- 필자가 다니는 사찰의 명상판넬 내용 中 -


그럼으로 이것이 진리다 라는 법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우리 사부대중은

 

집착없이 바라고

집착없이 행하는 

무위의 삶,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는 와중 그때그때의 조건에, 상황에 맞게끔 상대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행을 집착없이 행함으로서 향을 싼 종이에 향내음이 배듯, 중생들이 점차 불교의 향에 물들고 부처님의 광명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무주상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은..... 필자도 요즘 연구하고 있다.

어찌 하면 법상 없이 포교를 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집착 없이 바라고, 집착없이 행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중도를 잘 실천하고 무아법, 공성을 잘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연구에 있어서 좋은 실마리를 많이 알려주시는 분이 법륜스님이다.

 

그럼으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많이 들어보시길 바라며,

 

이 글을 이만 마치겠습니다.

 

+ 법륜스님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셨다.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이 있고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림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신구의 삼업을 바꾸는 것 뿐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과 연을 따져볼 때 내가 연이 아닌 내가 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결국 내 삼업을 행하고 말고의 영역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일들은 모두 나의 행이 인이 아닌 연으로.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연. 그 간접적인 원인. 그 나의 행을 비롯한 조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서 중중무진법계연기일 것이다. 해서 세상일이 마음대로 안되는 이유는 이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조건이 하나의 사건에 모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현상을 중생의 관점으로 구분지어놓았을 때 그 구분해놓은 하나의 현상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일즉다다즉일 인드라망의 원리로서 나머지 모든 현상들이 그 하나의 현상이 발생하기 위한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해서 세상일들 하나 하나에는 나 역시 조건으로 작용하지만, 나 뿐만이 아닌 수많은 조건이 관여하고 있고, 다시 말해서 중중무진이란 수많은 조건들에 의지하여 하나의 일이 일어나기에, 그래서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인연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형성된 조건에 따라서 세상 일은 발생하는 것이다. 이 내용 필자는 학부 수업때 들은 내용인데, 붓다브레인이란 책 초반부에 이 내용이 대략적으로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다. (고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 필자가 어제 경험하고 느낀 바는 교만함, 자만심은 연기법이라는 실상과 반대되는 실체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상은 연기법이고 나라 생각한 이 오온은 연기하는 흐름의 일부인지라, 조건의 영향을 안받을래야 안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헌데 이 연기법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연기하는 현상에는 실체가 없음을, 고로 실상은 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임을 망각하고서 필자는 어제 필자가 불교공부가 어느정도 되었고 수행도 어느정도 되었다는 교만심 자만심에 빠져서 게으름에 취해서 중생의 오욕락 특히 음심을 자극하는 글과 그림들이 많이 나오는 매체를 유희로 접했고 그 결과 금새 음심이 일어나고 의업으로 사음을 범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재가자이다.) 필자는 어제 이 같은 경험을 하면서 깨닫기 전까지는 결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꼈다. 모든 번뇌에 끄달리지 않는 경지에 아직 필자는 오르지 못했다. 필자는 탐진치가 참으로 많다. 해서 어저께 경험으로 '아 이 나라 집착한 이 것이 연기하는 것이었고, 나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구나.' 이를 강하게 느꼈다. (해서 나는 연기하는 형상이며, 그렇기 떄문에 조건형성이 중요함을 어저께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를 위해서 스스로 조건형성을 잘 하는 법이 바로 스몰스텝일 것이리라.)

 

+ 일어나는 현상들. 심신에서 경험되는 현상들은 첫번째 화살이다. 그 첫번째 화살은 조건이 이미 형성되어서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그 현상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두번째 세번째 화살을 맞지는 않을 수 있다. 첫번째 화살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조건이 그리 형성되어서 이미 일어나버리는 것인 것을. 그러나 그 첫번째 화살에 속하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판단없이 바라보는 위빠사나 수념처 수행을 한다면 두번째 세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며, 일어나는 그 현상 - 그 느낌들을 판단없이 바라봄으로서 업장소멸이 가능하다. (위빠사나 수념처는 https://blog.naver.com/prologue/PrologueList.naver?blogId=tenzinpalden 이 블로그의 위빠사나 카테고리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 오늘 기도할 때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내버려둔채로 내게 인식되는 내외부 일체경계가 결국 내 마음이 비친 것임을 새기며 관념을 떠나서 그저 조건을 형성한다는 생각으로 염불하고 주력하고 독송을 하니 기도수행이 원만했다. 시삼무차별을 앞으로 계속 새겨보며 수행해보고 연구해보면 좋을 것 같다. 

 

+ 시삼무차별임으로 지금 여기서 인식되는 모든 것을

분별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그냥 판단없이 바라봐보자.

 

그리고 기도를 할 때도 시삼무차별임을 알고서

나를 비롯한 지금 여기서 인식되는 모든 것을 분별 판단 구분짓지 말고,

염불을 하든 독경을 하든 주력을 하든 

그 수행을 하는 나와 그 수행을 통해 나오는 소리와 외부 경계를(즉 주와 객을) 구분짓고 차별하고 분리해서 바라보지 말고

다만 아무런 해석 분별 판단없이 지금 여기에서 들리는 독경소리 염불소리를 듣기만 해보자.

 

오늘 떠오른 아이디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

 

 

<불교교육 핵심은 ‘환경 조성’>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8285

 

“로터스관에서 한류학까지…120년 자긍심으로 세계 중심되는 동국 구현” - 법보신문

윤재웅 동국대 총장이 4년 임기의 반환점을 맞이했다. 취임 후 2년 동안 동국대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온 윤 총장은 이제 남은 2년 동안 학교의 미래 비전을 구체화해야 하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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