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그릇이 완성되는데 한 티끌이라도 부족해선 안된다. 불각(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성취하는 길도 그와 갔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3. 28. 15:40

저는 스승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가르침을 주신 분들은 모두 스승이시죠.

 

그중 한 스승님(스님)께서는 제게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릇이 완성되는데 한 티끌이라도 부족해선 안된다. 불각을 이루는게 그와 갔다.

 

선사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오늘 점심을 먹기 전 소심경을 읽었습니다.

 

소심경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원단일체악(願斷一切惡) 원수일체선(願修一切善) 원공제중생(願供諸衆生) 동성무상도(同成無上道)”
(일체의 악을 끊겠습니다. 일체의 선을 닦겠습니다. 원컨대 일체의 중생과 함께 무상도를 이루겠습니다.)

- 소심경 中 -

 

 

저는 밥을 다 먹고 나서 

그냥 자동적으로 습관적으로 젓가락을 든 손이 반찬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맛에 탐착한 것입니다. 탐착이란 탐내고 집착한다는 것의 줄임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탐낸다는 것은 모두들 아실 테지요. 탐욕. 탐심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갖고싶어하고 내것으로 하고싶어하고 취하고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즐거움을 누리고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착. 착은 집착입니다. 집착이란 실체시입니다. 본래 실상에는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쥘 수 있는 것이 없죠. 물을 쥘 수 있나요? 공기를 쥘 수 있나요? 불가능합니다. 사실 모든 것은 물과 마찬가지고 바람과 마찬가지고 공기와 마찬가지이며 허공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어서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고정불변하고 독립적(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바로 실체시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의 생각은 언어와 형상으로 구성되어있는데요,

 

언어(이름)와 형상이 지칭하는 것은 사실 항상성을 띕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와 형상이 지칭하는 것은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실상에는, 진실에는, 사실에는 이런 실체가 없습니다. 현실에는 이런 실체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생각이 지칭하는 것인 '실체'는 모두 관념일 따름입니다. 현실에는 없는 관념. 상상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죠.

마치 판타지소설에서 불을 뿜는 용이나 목이 세개 달린 개와 같은 망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중생은 이 같은 망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망상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현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있습니다. 있다고 할 실체는 없지만,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는 것과 같은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을 현상이라 하고 작용이라 합니다. 이 흐름 현상 작용에 실체는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맡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연기하여 발생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연기법이 곧 세상의 근본 이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하튼, 정리해보자면

 

우리는 이 같은 연기법이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언어와 형상으로 구성된 생각을 실상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 집착입니다. 어떠한 대상이, 어떠한 상황이, 어떠한 경계가. 내가. 너가. 중생이. 수명이. 시간이. 공간이. 실제로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이 집착입니다.

 

(그리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게 있어야 사실 이름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을 보고 물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물이라는 이름에 해당되는 요소가 어디있습니까?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분명히 보이고 만져지고 마실수도 있고 촉감으로 느껴도 지고 흐르는 물의 소리도 들리지만, 그 물의 실체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봐 볼까요? 물은 H2O입니다. 하지만 이 H2O에 실체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H2O는 단지 연기적으로. 조건에 의존해서 형성된 현상일 뿐입니다. 조건을 달리하면 H 2개와 O 1개가 떨어지게 되잖아요. 그리고 이 H와 O는 또한 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있고, 이 전자와 원자 역시 이를 구성하는 세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요소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다보면 소립자란 놈이 나오는데 이 소립자는 양자역학적으로 볼 때 관측자에 의존재 있을 때만 알갱이 형태로 존재하고 관측자가 없을 때는 에너지 형태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제가 과학을 잘 몰라서 이 지식이 정확한지 아리까리한데.. 아마 맞을겁니다. 한번 양자역학에 대해 검색해보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결국 양자역학적으로 볼 때 모든 존재는 존재라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상의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이 성립됩니다. 물론 의존해서 발생되기에 존재한다고 할 만한 실체는 없고, 다만 현상만이 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소심경을 읽고 나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밥그릇을 다 비울 때 쯤. 

 

밥풀떼기 몇개만 밥그릇에 남았는데 제 젓가락을 든 손이 반찬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네. 맛에 탐착한 것입니다.

반찬의 맛에 탐내고 집착한 것입니다.

반찬의 맛있는 맛을 더 혀로 느끼고 싶고, 또한 그 맛있는 맛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집착한 것입니다.

 

해서 제가 젓가락을 든 손이 반찬을 향하려는 때 일단 이를 알아차렸고

순간적으로 고민했습니다.

 

'먹을까 말까..'

 

그리고 앞서 적언놓은 소심경의 구절 중 <원단일체악 원수일체선> 을 떠올리고는

손을 되돌렸습니다.

 

원단일체악 원수일체선은 원컨데 일체의 악을 끊겠습니다. 일체의 선을 닦겠습니다. 라는 게송입니다. 서원이기도 하죠. 저는 이 구절을 떠올림과 동시에 예전에 한 선사 스님께 배운 이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그릇이 완성되는데 한 티끌이라도 부족해선 안된다. 불각을 이루는게 그와 갔다.

- 선원 스님 -


 

제 목표는 불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일체지자 무상사 조어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같은 목표를 갖게 되었냐면

이 길이 제 현생의 가족 친척 조상님들과 원공법계의 일체중생에게

가장 최고로 이익을 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상정등정각을 얻고 부처님이 되는게.

그것이 가장 최고로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같은 가르침들을 떠올리면서

 

맛에 탐착해서 더 반찬을 먹으려는 것을 관둔 것입니다.

 

탐욕은 악이니까요.

탐진치가 세가지 독과 같은 마음이지 않습니까.

불교의 번뇌를 요약하면 결국 탐진치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불각을 이루려면, 그릇이 완성되는데 한 티끌이라도 부족해선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임으로.

 

조그마한 악조차도 모두 끊어내고

조그마한 탐욕과 성냄조차도. 그리고 조그마한 어리석음조차도. 모두 끊어내고.

일체의 번뇌를 모두 끊어내고(번뇌무진서원단)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체득해야 할 것입니다.(자정기의)

더불어 많은 선을 닦아서 복을 구족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지혜도 구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복과 지혜를 구족하신 분(양족존)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두 이 같은 부처님의 모든 행을 본받고

모든 법문을 배우고(법문무량서원학)

불도를 이뤄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고 부처님, 일체지자, 조어장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불도무상서원성)}

 

해서 저는 맛에 탐착하여 반찬으로 향하던 젓가락을 되돌리고,

 

그리고 밥풀을 싹싹 긁어먹고 난 뒤

발우공양을 할 때처럼 김치 한조각 위에 따뜻한 물을 붇고(원래는 숭늉으로 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김치로 밥그릇을 깨끗이 닦고 

닦은 물을 마시고 김치 한조각도 알아차리며 먹고서는

 

깨끗한 물을 담아 한번 행군 뒤

 

소심경의 나머지 게송과 진언을 외우고

물을 싱크대에 버린 뒤(아귀에게 주는 겁니다.)

 

다시 자리에 앉아 해탈주를 외우고 식사를 마무리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식사를 마무리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겠다는 마음을 오늘 낸 뒤(소심경을 읽으며)

이 마음(서원)을 실천하니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이로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길은

바르게 사는 것이며

 

칠불통계게와 같이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에게 제가 퀘스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하루 중 언제 편안한가요?>

 

이 질문을 날마다 생각하시면서 매일 한번 내지 살펴질 때마다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사실 이 것은 법륜스님의 정토불교대학에서 시행하는 수행연습입니다.

 

저는 지금 정토불교대학을 온라인으로 들으며 공부를 하는 학생이죠.

 

(여러분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6개월에 1번식 모집합니다. 올해 8월 즈음 다시 모집공고가 나올 것입니다. 정토회 홈페이지를 자주 이용해보세요. 거기 매일 올라오는 스님의 하루도 잘 챙겨보시면 이익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이라 함은. 네. 마음이 많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아무리 돈이 많고 학벌이 좋아도 괴로우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인간은 모두 행복하려 삽니다. 행복하려 사는데 불행하다는 것이 아이러니죠. 해서 행복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그리고 정토불교대학은 법륜스님의 70년 인생의 정수를 녹여서 담아놓은 아주 아주 좋은 수업이 진행되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꼭 정토불교대학을 신청해서 다녀보시길 바랍니다. 입학금이 있지만, 이 역시 다 자리이타적으로 세상에 환원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토회 JTS 에서 하는 일은 과거의 스님의 하루 글들을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이 수행연습 제가 보니 아주 훌륭한 수행연습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차림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고자 살아가지만

정작 행복하진 않다는 것이 앞서 말했듯 아이러니죠.

 

이게 다 알아차림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불교에는 정진이란 단어가 있죠.

 

사실 이 말은 더 정확히는 정정진입니다.

 

정정진은 팔정도 중 1가지 한목입니다. (팔정도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8가지 바른 길을 말합니다. 궁굼하신 분들은 유튜브에 팔정도라 쳐보시길 바랍니다.)

 

이 정정진은 제악막작 중선봉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악은 없애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은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선은 유지하고 더욱 증장시킨다.

 

이 것이 정정진입니다.

 

이 정정진에 기반해서. 그리고 연기법에 기반해서.

 

스스로를 잘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관찰해서

스스로가 편안한 때를 찾고, 또 스스로가 괴로운 때를 찾습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편안한 상황은 언제인지.

스스로가 괴로운 상황은 언제인지.

편안하다면 왜 편안한지 그 편안한 원인을 분석하고

괴롭다면 왜 괴로운지 그 원인을 분석합니다.

 

해서 편안한 상황은 증장시키고

괴로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이를 위해서 편안함을 주는 원인은 늘리고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은 제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정진이며, 

연기법에 입각한 수행인 것입니다.

 

인연관이라고도 하죠.

어떤 현상(상황)이 발생되면 그 상황이 발생된 인연은 무엇인가를 관찰해보는 것입니다.

해서 그 인연을 파악했다면, 

 

그러한 인연이 앞으로 형성되지 않게끔,

그런 인연을 조성하지 않는다면 그 같은 상황은 앞으로 발생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인연을 조성한다면 그와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발생될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인연생기법의 줄임말이 연기법입니다.)

 

콩심은데 콩이 나고 팥심은데 팥이 납니다.

 

해서 저는 오늘 발견했네요. 제가 편안한 조건을

 

원단일체악 원수일체선. 

일체의 악을 끊겠습니다. 일체의 선을 닦겠습니다. 라는 제가 세운 원을 실행에 옮기니

그러니 편안했습니다.

 

이 같은 악을 끊고 선을 닦는 행위가 원만구족해진다면 저는 불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각. 부처님의 깨달음. 즉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여 부처님, 무상사, 조어장부가 될 때(무상사 조어장부는 부처님의 다른 명칭입니다. 여래 10호에 대해 검색해보세요.)

 

https://blog.naver.com/tenzinpalden/223658307737 → 이 블로그 정말 좋은 블로그입니다. 이 블로그 다른 글들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여래십호!!! 불자들은 여래십호만큼은 외워야 하네.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부처님/세존/여래/붓다께는 열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이걸 여래십호라고 하는데... 이 여래십호 자체가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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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dis030/220532739761

 

여래십호(如來十號)

여래십호(如來十號)여래십호란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이다. 즉 부처님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경전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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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최고로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고, 원공법계의 일체중생에게 이익과 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끔 해줄 수 있을테니까요. 부처님이 되는게 최고로 효도할 수 있는 길이며, 가장 최고로 원공법계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길입니다.

 

저는 이 같은 제가 편안해지는 조건을 찾았습니다.

 

알면 자꾸 실천하게 되겠죠.

 

사람들은 알아차림이 부족해서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고싶어도 행복하지 못한 것이지만

불자들은 외부경계는 모두 실체없는 현상인지라 꿈같고 환상같고 물거품 그림자 같은 줄 알고

외부 경계를 실체시(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구의 행위만을 바꾸고 

외부경계를 바꾸려 하는게 아니라 외부경계와 접촉했을때(만났을 떄) 일어나는 자신의 감각 느낌(두려움과 불안등의 느낌)과 생각과 충동을 판단없이 바라볼 뿐.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이며 자귀의입니다. 자귀의란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신수심법 사념처가 바로 자귀의입니다. 바로 윗 문단의 내용대로 자신의 감각 느낌 마음 그리고 법을 판단없이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하는게. 즉 판단없이 바라보면서 그 현상의 실체를 (실체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이라고 하죠.) 이해하고 이해를 넘어서 체득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이 같은 수행이 자귀의죠.

 

쓰다보니 이런 저런 내용을 글에 담게 되었습니다.

 

해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도 불교를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

좋은 법문들이 나오는 유튜브 채널 목록에 대한 추천목록 밑에 남겨드리겠습니다.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13

 

불교 유튜브 채널 추천목록 (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에서 추천하는 목록입니다.)

1. 정토회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볼 수 있는 유튜브 채널입니다.(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란 유튜브채널도 별도로 있습니다.)https://www.youtube.com/c/JungtoOrg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법륜스님의 즉

findthebrightroad.tistory.com

 

그리고 여러분도 정토불교대학 다녀보시길 바라구요.

그리고 위에 제가 추천한 블고그의 글들도 많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약 6600개가 넘는 글들이 이 블로그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서 말씀드린 수행연습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수행연습이 바로 정정진이며 인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며 자신이 언제 편안한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행복해집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야 행복해집니다.

 

마음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마음에 대해 잘 모릅니다.

이 마음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에 대해 가장 잘 설명된 가르침이 바로 불교입니다. 심리학은 쨉이 안됩니다.

 

그럼으로 다시금 불교를 공부해보시길 권하며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나무 불법승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