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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법무아에 대하여 통찰한 내용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18. 18:38

제법무아의 아. 나. 나란 언어표현이다.
결국 제법무아란 언어에 해당되는 고정불변의 속성을 가진 실체란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제법이 연기한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그 현상에 중생들은 이름 개념을 붙이지만
개념은 하나가 아닌 구분지어 다수로 보는거고 나누는거고 독립적이고 항상성을 지닌 실체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조건에 의존해 발생한 현상은 분리된바가 없이 모두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으로 나타난다. 상호가 상호의 조건이 된다.

결국 모든건 하나의 현상이다.

그리고 그 현상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에,

무명이 없던 명이던 시점엔 본래 없던 것이다.

즉 오온과 삼독심은 본래 없는 것이다.

고로 제법무아란 언어에 해당하는 속성을 지닌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으며, 고정된 형상과 같은 실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생각은 언어와 고정된 형상으로 이뤄져있으니

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논하기에 중생들은 고락을 반복하며 윤회하는것이다.

고로 생각이 곧 사견이고 어리석음이고 번뇌다.

교리적으로 정견(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란 연기시(연기하는 현상을 연기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고 삼법인과 불이법을 보는것이고

사견(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 즉 착각하고 망상에 빠져있는 것.)이란 실체시(언어 문자 개념 고정된 형상이란 실체적 관념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일 것이다.

결론은 자타를 구분짓고 내가 있다 생각하는것 모두 언어로 세상을 보는거다.

근데 실상은 연기하는 현상만이 있고 이 현상은 발생에 있어 의존한 조건이 사라지면 이 현상도 사라진다. 그리고 연기하는 현상에는 내가 없으며 더불어 나누고 구분짓고 실체시하는 언어,말,이름,개념에 해당되는 실체도 없다. 그래서 이를 체득하면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에 대한 분별도 없을것이리라.(필자는 이게 안된다. 지식적으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인지라 체득은 아직 먼듯 하다.)

그리고 이 같은 연기하는 현상은 (근본적으론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 때문에 무명이 본래 없던 크고 밝고 원만한 진여의 자리에서는) 본래 없는것이다. 오온도 삼독심도 삼독심을 일으킨 조건이 된 경계도 본래 없는 것이고 연기한 것이고 공한 것이다.

해서 이 공한 마음자리를 반조하자.

반야의 지혜로 제법이 공하며 본래 없는 것임을 꽤뚫어보아서 마하(=진여=본래면목)를 체득하길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나무 무량수 무량광 여래 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


결론 재요약 : 이름 붙이지 말고(=실체시 하지 말고) 연기하는 현상으로 보자. 이름과 고정된 형상으로 이뤄진 것이 생각임을 알고 생각을 줄이자. (말나식에 속지 않게끔 이름 붙이지 말자.) 그래서 볼 때는 단지 보기만하고 들을 땐 단지 듣기만하자. 바히야경에 나오듯. 수행적으로서 말이다.




참고자료 :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광덕스님 지음/불광출판사> , <생각이 길이다-용타스님 지음/민족사> , <성난 물소 놓아주기-아잔브라흐마 스님 지음/ 공감의 기쁨>, <하루 1분 마음챙김-아잔브람 스님 지음/느낌출판사> , <아바타라 안심이다-월호스님 지음/마음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