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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바라는 바 없이 하기. 느낌과 생각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면 그 알아차리는 순간은 부처님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4. 3. 16:51

경전에 보면 기도의 공덕에 대해 나오는 부분이 있다.
그 공덕을 얻고자 기도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 공덕에 대해 경전에 설해진 부분 역시 결국 언어다.
언어는 이분법이다. 결국 그 공덕을 얻고자 기도하는 것은 욕심이고,
그 공덕이라 하는 이름을 실체시 한 것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다라니를 외울 때 욕심이 없이.
즉, 바라는 바 없이 외우신다.
그러니 향상하신 것이다.
 
기도는 바라는 바가 없어야 된다.
다만,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으로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괴로움과 마주하게 되고, 바라는 바. 소원이 생기게 된다.
 
이 같은 발원, 소원은 기도 앞과 뒤에 시간을 잡고 딱 해주고,
기도할 때는 기도만 해야겠다.
염불을 할 때는 염불만 바라는 바 없이 하고,
다라니를 외울 때는 다라니만 바라는 바 없이 외우고
독경이나 사경이나 간경을 할 때는 그것만 바라는 바 없이 하는거다.
 
나는 그간 욕심때문에 이 기도도 하고 저 기도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욕심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간 공덕에 욕심내서 하던 다라니 기도 등을 다 이제 내려놓고.
하나만 해야겠다고 마음이 든다.
 
관음정근.
 
관세음보살님만 불러야겠다.
 
스승님은 내게 말씀해주셨다.
 
모두 다 똑같다고.
모든 기도가 다 똑같다고.
 
결국 만류귀종이라는 말씀이기에
하나만 잡고 하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그러니 하나만. 가령 관세음보살 염불이면 관세음보살 염불.
진언이면 진언. 독경이면 독경. 하나만 잡고 하면.
일심이 되고 삼매에 들 수 있으리라.
 
단 계를 지키는 청정한 생활을 할 때에만 정학을 성취하여 삼매에 들고,
그렇게 삼매에 들 때 지혜가 생길 수 있으리라. 무상 무아 공 무자성 연기를 체득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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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김밥이나 강아지를 본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은 좋은 느낌이
어떤 사람은 싫은 느낌이
어떤 사람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 느낌따라 곧이어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생각.
 
'아 맛있겠다.' '아 맛없어보인다.'
'아 귀엽다.' '아 개털날리겠다.' '뭐지 저 생물체는?' 
'눈이 동글동글하네.' '좋다.' '싫다.' '그냥 좋지도 싫지도 않은데?' 등등..
 
그리고 그 생각이 일어나면 뒤이어 의지가 일어날 것이다.
느낌이 즐거운 느낌이고, 생각이 긍정적이라면 김밥은 먹고싶거나 개는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날 것이고,
느낌이 괴로운 느낌이고, 생각이 싫다는 생각이 든다면 김밥은 먹기 싫을 것이고 개는 피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날 것이다.
또 느낌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면 별 생각이 없거나 어 김밥이네 라거나 어 개네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나 그 강아지나 김밥에 대해 뭘 하고싶다는 욕망이나 의지력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해서 어떤 욕망이 일어나면 그 욕망에 따라 가지려 하거나, 괴로운 느낌과 싫거나 짜증난다는 생각이 든다면 피하거나 멀리 떨어지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날 것이다. 이 욕망이 의업이고, 이 의업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면 구업과 신업이 된다.
이렇게 지은 행위는 우리의 의식속에 쌓인다. 
 
또한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성을 듣고
코로 향을 맡고
혀로 미를 맡보고
피부로 촉을 느끼면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에 따라서 개념 언어로 표현되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에 따라서 의지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가장 처음 일어나는 의지작용이 의업이고,
이 의업을 말과 몸으로 옮기면 구업과 신업이 된다.
 
그렇게 행위를 생각, 말, 행동으로 한 것이 의식속에 저장된다. 이것이 식이다.
이렇게 의식속에 행위가 쌓이며 기억이 되고, 이를 기반으로 분별작용이 일어난다.
이 같은 식 중 6식과 7식은 윤회하지 않지만, 그 속의 8식인 아뢰야식은 종자식으로서
내가 그간 지어온 행위들이 모두 씨앗처럼 저장되어 윤회를 하게 되고,
그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들이 환경이란 시절인연을 만나게 되면 색수상행식의 경계로 피어나게 된다.
그것이 중생이 마주하는 세상이다. 
 
이 같은 물질,느낌,생각,의지(행위),의식 이 다섯가지를 오온이라 한다.
 
그렇다면 수행이란 무엇일까.
 
느낌과 생각이 일어난다면, 여기서 더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시점은 부처님이다. 그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부처님이다.
 
하지만 느낌이 들고, 곧이어 생각이 일어나는데, 이 생각을 계속 스토리를 이어가거나,
생각이 일고 그 뒤 일어난 의지작용, 욕망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욕망을 표출하거나 참으면 이는 중생이다.
 
그러니 수행이란 느낌과 생각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알아차리는 순간은 부처님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느낌의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이 명확진 않지만 법륜스님의 반야심경강의란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오온은 모두 연기한 것이다. 인연생 인연멸 하는 것이다. 고정불변하고 독립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인연따라 생겨났고, 인연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중생은 이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보자면 이 오온은 참된 내가 아니다. 인연따라 변화하며, 모였다 흩어지고 파도와같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무더기일 뿐이니까.
 
오늘 법문에서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고 들었던 것 같다.
결국 이를 아는 것이 계정혜 삼학 중 혜학. 지혜이리라.
 
계를 잘 지키고,
사마타 위빠사나 염불 명상 간화선 절 주력(진언) 독경 사경 간경 예불 등등의 정학을 닦으면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제법무자성, 오온개공, 아공법공)를 체득하는 지혜가 생긴다.
 
이것이 계정혜 삼학이다.
 
계를 잘 지키며,
정학을 계속 닦아나가야겠다.
 
염불도 정학이다.
 
한 우물만 파자. 내게 맡는 기도. 내게 맞는 염불을 하는 것이다.
맡다고 생각되는 것. 내게는 관음정근이다. 결국 이렇게 귀결된 듯 하다.
 
이제 바라는 마음 없이,
그리고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이어가지 않고 딱 알아차림 하며
관세음보살을 지속해서 염해야겠다.
 
고성염불도 좋지만 
작은소리도 좋고
소리가 바로 옆에 있어도 안들릴 정도로,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입만 뻐끔뻐끔대는 정도도 괜찮다.
 
스님은 법문에서 말씀해주셨다.
 
자신의 스승님이 물살이 센 개울 옆에 가서 염불을 하며 자기 염불소리를 귀로 들으라고 하셨다고.
그래서 모르던 시절에는 물소리를 이기려고 악을 쓰며 고성으로 염불을 해서 목이 쉬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물소리에도 불구하고 자기 염불소리를 듣는 방법을 터득하셨다고 하셨다.
 
그 방법은, 작게 염불하는 것이다.
작게 염불하며 자기가 염불하는 소리를 자기 귀로 듣는것이다.
 
핵심 포인트는,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염불을 해도
집중하면 자기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이다.
 
핵심은 집중인 것이다.
 
(초심자는 염불을 할 때 마음(주의)을 자신의 염불 소리에 두면 좋을 것이다.
칭명염불 시에 말이다.)
 
스님은 이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해서 마음이 오직 자기 염불소리에만 머무르며
염불을 지속할 때
 
일념이 되며 염불삼매에 들 수 있다고 배웠다.
 
 그 때 관음경에서 나오듯,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니
관세음보살님은 나의 염불소리를 들으시고 내게 와서 나를 괴로움으로 부터 해탈시켜 주실 것이다.
 
나무 관세음보살.
 
노는입에 염불해야겠다.
오늘 배운 바 대로 바라는 바 없이 기도해야겠다.
오늘 배운 바 대로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려야겠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은 부처님이다.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고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에 집착해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고 악하다는 등의 분별을 하고(=실체시를 하고=개념,언어로 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여기고)
욕심을 부리고 의지를 일으키고 행위를 하며
생각을 계속 이어가거나, 탐심이나 진심을 일으키면 중생이다. 
 
(물론 탐심이나 진심을 말과 몸의 행위로 옮기면 의업만 일으킬때보다 더 큰,
그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를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배운 바 대로 바라는 바 없이 기도하며,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이어가거나, 탐심 진심으로 연결시키는게 아닌,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잘 알아차려서, 행위로 이어지지 않게 해서
식에 업장이 쌓이지 않게 해야겠다.
 
알아차리는 순간이 부처님이다.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 없이 주는 것이 무주상보시다. 마치 바라는 바 없이 갓난아이를 돌봐주는 어머니와 같은, 그리고 분별하지도 않고 조건을 붙이지도 않으며 만물에게 빛을 비춰주는 태양과 같은,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머무름이 없는(=무주상) 보시 말이다.
 
그러니 느낌과 생각을 잘 알아차리고
바라는 마음 없이 기도해야겠다.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