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수행은 판단하지 않는 것. 고락 분별의 양변을 잡지 않고 판단 없이 알아차리는 것. 바라는 마음 없이 (염불하거나) 기도하는 것.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4. 4. 08:00

깨닫고 싶다
수행을 하자

중도 수행을 하자
연기를 관하자
공을 관하자

제법이 연기했다
색수상행식이 연기했다
연기한것은 무자성이다
무상하고 무아고 공하다

고정불변의 독립적 실체는 없다
허나 중생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즉다 다즉일
one for all, all for one 이건만
이같은 연기법을 모른다
해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구분지어보고,
구분지어본 일부에 이름을 붙여 부른다
이것이 실체시요 분별이오 어리석음이고 집착이다.

여기서 고통이 발생한다.

난 괴로움서 벗어나고싶다.

수행을 하자.
수행은 판단하지 않고 알아차리는것

고락의 양변을 추구하는게 아닌
고도 락도 알아차리는 것

언어는 이분법이다. 고락도 이분법이다.
양변의 극단을 잡지않고
단지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린다.

그것이 법답다.
실상 모든게 연기하기에
부분적으로 단편적으로 보는게 아니라
연기하는 전체 실상을 보면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가 아닌
바다 자체를 보게된다.

그럼 그간 중생심으로
저건 좋고 저건 나쁘고
이건 선하고 이건 악하고
이건 재앙이고 이건 복이고
분별하던게 중생심이었고 어리석음이었단걸 알게된다.

수행은 판단하지 않는것.
판단은 언어 개념으로 하는 것.
언어 개념은 이분법.
이것이 있음 이것이 아닌것이 존재하는 것이 언어고 개념.
진리는 불이법.
허나 언어는 둘이 존재하는 것.

진리는 실상은 불이법.

경전도 방편이고 뗏목.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니.

수행은 깨달음으로 향하는 방편.

깨달음은 불이법을 깨닫고 연기 공 중도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깨닫는 것.

중생의 괴로움은 분별에서 발생된 것.

일어나는 색수상행식의 경계
일어나는 생성향미촉법의 경계.

이 경계를 좋다고 분별하면
무상하기에 필연적으로 좋다고 이름붙인 경계는 멸하기에 그 뒤엔 괴로움이 발생된다.

또한 악이라고 분별하면 또한 괴로움이 발생된다.

허나 실상은 이분법을 떠나있는 것.

중도 수행은 알아차리는 것.

분별하는 것은 실체시
분별하는 것은 언어를 붙이는 것
분별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고행과 쾌락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알아차려야 되며
언어 개념 분별 판단 해석 생각으로 하는 실체시를 버리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챙김 명상 마인드풀니스에서는 판단없이 일어나는 느낌 생각 감정을 알아차리고 바라본다.

이것이다.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판단없이 알아차리고 바라보자.

경계를 만나서 느낌이 일고 그 뒤 생각이 인다.
여기서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그 순간은 부처님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생각을 이어가고 욕심을 내거나 진심을 내서 신구의로 행위를 하면 그것이 의식속에 저장되어 과보가 발생한다. 이는 중생의 길이다.

알아차리자.

느낌 생각이 일어날때 알아차리자.
이를 놓쳤음 감정 욕구가 일어날때 알아차리고
의업이 일어날때 알아차리자.
그래도 놓쳤음 말과 행동을 하고 난 뒤에라도 알아차리자.

그렇게 놓쳤다면 그래도 알아차리기를 반복하다보면 알아차림도 는다.
알아차릴때 중도적으로 알아차리는것은 판단없이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자.

경계를 만나면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
괴로운 즐거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고

그 뒤 생각이 일어난다.

이 느낌을 알아차리고

놓쳤다면 생각을 알아차리자.

생각이후 의지작용이 일어난다.
욕심과 진심. 생각도 놓쳤다면 이를 알아차리자.

판단없이.

해서 어리석음에서 기인한 구업과 신업을 짓지도 말고,
분별 해석 판단으로 이뤄진 생각을 계속 이어가지도 말자.

판단하지 말고 단지 그저 일어나는 오온 현상을, 경계를 알아차릴 뿐. 바라볼 뿐.

더럽다고 생각하니 피하고싶고, 피하지못하니 괴롭다.
악하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니 피하거나 없애고싶고, 그러지 못하니 괴롭다.
좋다고 생각하니 갖고싶고, 갖지못하니 괴롭다.
이 같은 더럽고 깨끗하고 선하고 악하고 좋고 나쁘고의 분별에서 떠나자.
수행적으로 말이다.

일상에선 지혜롭게 분별을 해야겠지만
수행적으론.
수행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것이니.

수행적으론 판단하지 않고 단지 알아차리는 중도적인 길을 가는것이다.

고로 느낌 생각이 일어날 단계에서
판단없이 알아차리자.
해서 생각을 계속 이어가거나 업을 짓지 말자.
알아차리는 순간은 부처님이다.

실상은 연기하기에 무자성이다.
실상은 연기하기에 일체만법이 둘이 아니다.
해서 실상은 언어로 이름붙일만한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음을 알자.
모두가 하나다. 둘이 아니다.

이치가 그렇다.
하나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하나를 위한다.

인드라망.

이 삼라만상중 나 자신과 연관성 없는건 없다.
나라 하는 것은 이 삼라만상이란 일체의 인연에 의지하여 잠시 일어난 현상이고 무더기일 뿐이다.
오온의 무더기.
이 오온의 성품은 삼법인이다.
무상 무아 고.
다른말로는 오온은 연기하는것이고
무자성이며
공하다고 할 수도 있다.

물질로된 육신은 연기했다.
느낌도 연기했다.
생각도 연기했다.
욕망과 의지작용도 연기했다.
의식도 그 의식안의 무의식도 연기했다.
해서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오온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듯 하다.

수행을 하자.

우선 계학을 닦자.
그리고 계를 잘 지키며 생활하는 기반에서
정학을 닦자.
명상도 간화선 수식관도 정학이지만
염불 주력 독경 사경 간경 절 예불도 모두 정학이다.
나는 관음정근을 한다.
이 정학을 닦을땐 바라는 바 없이 닦자.
기도할땐 바라는바 없이 기도하자.
그게 무주상이고, 그게 중도적이다.
바라는 바라 함은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의 앞과 끝에 발원을 하되
기도 중에는. 즉 내 경우 관세음보살 염불을 할때는 바라는 바 구하는 바 없이 단지 관세음보살님만 일념으로 부르는 것이다.
단지 내가 내는 관세음보살님 염불소리에만 마음(주의) 를 두는것이다. 판단없이 기도하는것이다. 판단없이 염불하는것이다. 바라고 구하는바 없이, 실체시 없이, 판단 분별없이 기도 중 일어나는 생각 느낌은 단지 알아차렸다면 즉시 관세음보살님 소리에 다시 마음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관세음보살 염불소리에 마음을 두는것을 지속하다보면 일념이 된다. 그럼 그때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아직 들어보진 못했지만.

그럼 그 때 무상 무아 고를 생각으로만 아는게 아닌 체득할 수 있을 것이리라.

바라는 바 없이 염불 기도해야겠다.
일어나는 경계는 판단없이 알아차린 뒤
다시 관세음보살 염불소리로 돌아오자.
수식관을 하는 이는 호흡으로
걷기명상을 하는 이는 발바닥 감촉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리고 계속 그 정학(삼학중 정학)의 대상에 마음을 머무르자.

나는 이렇게 수행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일어나는 느낌 생각 감정도 판단없이 알아차리고
알아차렸다면 수행의 대상인 내가 마음 주의를 머무를 곳으로 돌아와, 그 수행에서 마음을 머무를 대상에 주의를 둔다. 마음을 둔다.
이를 반복한다. 내경우 그 수행에서 마음이 머무를 대상 즉, 마음의 집은 염불소리다. 관세음보살님 명호를 염불하는 소리다.

내 경우 작게 염불한다. 집중하면 작게 염불하는 소리도 들린다. 주변환경이 시끄러워도 내가 집중하면 작게 입만 뻐끔거릴 정도로 염불해도 그 소리가 들린다. 그 들리는 염불소리에 주의를, 마음을 둔다. 그곳이 내 마음의 집이다.

바라는 마음 없이 기도하자.

알아차리는 순간은 부처님이고

느낌 생각 이후 행위하고 생각에 빠져버림 중생이다.

오온은 내가 아니다.

진공묘유. 이는 공부하다보면 명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색 물질
수 느낌
상 생각
행 의도 욕심
식 기억이 쌓인것. 분별작용이고. 행이 쌓인 것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나.

느낌 생각 그 단계서 알아차리는게 수행이고 그렇게 알아차림 부처님이다. (중도적으로 판단없이 알아차리자.)

불교의 모든 수행 기도는 만류귀종이오 다 똑같다. 우열이 없다. 우열을 구분하고 따지는것 또한 언어 문자에 사로잡한 것. 실체시한것. 분별이다. 높다함은 낮다는 개념이 존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진리는 불이법이다. 모든 언어 명칭은 유위법이다. 일체유위법은 연기하는것이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다.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것이다.

고로 난 여러가지 수행을 병행하다가 그것이 욕심때문임을 알게된 뒤로 관음정근만 한다.
물론 개인의 인연 조건에 따라 수행의 방식과 가지수는 나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기도를 할 시에 바라는마음 없이 하자.
내 경우 염불을 하는 도중은 바라거나 구하거나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염불을 해야겠다. 판단 분별 없이 그저 관세음보살 염불소리에만 마음을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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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작성해 보았다. 작성해보니 좀 더 배움이 정리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