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내가 기도를 할 때 마음이 밝아지고 편해지는 방법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4. 3. 08:37

나는 매일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할 때 마음이 밝아지고 편해지는 방법들을 생각나는걸 몇가지 적어보려 한다.
 
기도 마지막에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운다.
이건 유튜브불교대학 우학스님 금강경 독경을 들으며 배운 것이다.
이때 마하는 무자성 공을 의미함을 새기고, 반야는 일체의 현상이 모두 실체없어 공함을 바라보는 지혜라고 새기며 마하와 반야가 지칭하는것이 결국 같은 무자성이며 공임을 새기며 그 공을 체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라빌을 외운다. 바라밀은 이쪽 강변에서 저쪽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는 행이 바라밀 아닌가? 육바라밀. 나는 이 같은 새김을 하며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운다. 물론 반야심경을 외울 때도 마찬가지다.

(근데 이렇게 안하고 그냥 생각없이 마하반야바라밀을 소리내서 외우기만 할 때도 있다. + 나는 이 방식이 정답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는게 아니다. 혹시나 어떤 분들은 이 글을 읽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도가 더 원만해지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이 글을 쓰는거지 이 방식만이 정답이라는 실체적인 견해 즉 집착으로 이 글을 쓴것이 아니다. 실상은 금강경에 나오듯 무유정법임을 명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은 나는 한문반야심경을 외우는데 이 때 뜻을 알기 위해 한글 풀이 된 반야심경을 보면서 한문 반야심경을 읽는다. 더 좋은 건 한자를 한글자 한글자 사경해가며 그 뜻과 음도 공부해보는 것이리라. 어쨌든 마하반야바라밀도 그렇지만 나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읽을 때(나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한문본으로 독경 시 그 뜻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한글본과 대조를 해가며 읽어보고, 또 한문본의 한자를 사경하던지 해서 공부해보면 좋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기도 중 불쾌감이나 불편한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없애려 하지 않고 그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데로 기도를 지속해 나간다. 그 마음, 그 불쾌감을 느끼면서 계속 나아간다랄까? 이 방법이 탐착하려 하거나 싫어서 성내고 피하거나 거부하려들고 저항하는 게 아닌 알아차리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판단없이 바라보기. 일어나는 신수심법 현상을 판단없이 바라보기. 이것이 위빠사나이며 사념처이다. (사념처를 하는 것이 바로 자귀의이다. 니까야를 읽어보면 이 같은 자귀의의 정의를 알 수 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경문의 내용을 새기며 기도를 한다. 관음정근이나 대다라니를 읽을 때 역시 마찬가지다. 즉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으로서 기도하고자 하고, 무주상으로 기도하고자 한다. 무주상으로 기도하고 사상이 없이 기도하고자 한다 함은 구분하고 차별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바라보는 관점. 즉 실체시. 다시 말해서 중관학적으로는 희론의 관점을 갖지 않고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하나이며, 또한 그 하나의 현상에는 현상이라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그런 관점으로서 기도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 문단의 내용은 필자도 해 보려 하는 내용이다.)
 
바로 위 단락의 내용의 연장선에서 조금 더 예기해보자면 인드라망이자 불이법의 관점을 갖고 기도를 필자는 해 보려 하는 것이다. (물론 더불어 반야의 관점도 함께 갖으면서. 집착없이.)
 
그리고 필자는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임으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실체가 있다는 견해인 실체시가 없이 기도를 하고자 함으로 실체를 지칭하는 요소인 '언어'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기도를 진행하고자 한다. 해서 이 같은 관점으로 기도를 진행하다보면 모든 일을 이루는건 내가 아닌 불보살님임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관념일 뿐이고 (나라는 언어가 지칭하는 것은 나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실체이다. 하지만 그런 실체는 현실에는 없다. 실상은 인연생기하는 현상이고 그 현상에는 고정불변하고 독자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해서 세상의 이치는 연기법이며, 그 연기법에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제법무자성 일체개공의 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는 기도 시작과 마지막에 서원을 세운다. 관세음보살님. 발원합니다. ~~, ~~, ~~, ~~하기를 발원합니다. 이런식으로 말이다. 때로는 기도 시작부분에서만 서원을 세우거나 마지막부분에서만 서원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기도 중 적어도 기도 전이나 후에 1번은 서원을 세운다. 그리고 항상 기도 가장 마지막에는 원성취진언, 보궐진언, 보회향진언을 외운다. 그리고 원성취진언 보궐진언 보회향진언을 외울 때 역시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실체시나 집착을 갖지 않고서 수행으로서 진언을 외우고자 한다.
 
수행으로서 진언을 외우고자 내가 하는 기도 방식은 우선 이 세가지 진언들을 외우기에 앞서 불법승 삼보님께, 관세음보살님께 제가 회향할 때는 원공법계의 일체중생과 삼보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제가 지금껏 지은 모든 공덕을 회향하겠습니다. 라고 마음속으로 말씀드리거나 소리내어 말씀드리고. 그 다음 이 진언들을 읽는 것이다. 보회향진언을 읽기 전 이 말을 마음으로든 소리내서든 하고 난 뒤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세가지 진언은 언어와 형상, 분별, 희론, 실체시, 집착을 떠나서 수행으로서 외운다. 이 진언을 외울 때는 일체중생을 실체시하지도 않고 삼보님을 실체시하지도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체시하지도 않는다. 실상은 그저 공일 뿐이다. 그러니 모두에게 회향함을 의미하는(걸로 그 뜻을 필자는 알고있음) 보회향진언을 말한 뒤, 그 다음에는 언어와 형상으로 이뤄진 생각을 떠나서 진언을 외운다. 진언은 해석하는게 아니라고 알고 있다. 필자는 진언을 생각 없이 그냥 외우는 것이다. 이 진언의 이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이것이다. 뭐 이런식으로 새기면서 읽는게 아니라, 진언을 외울 때는 그냥 진언을 외우는 것이다. 생각 역시 진언의 구절만을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생각이 그때 일어나도 어짜피 그 생각의 구성물인 언어와 형상이 지칭하는 것은 실체이고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니니 그 생각은 거짓일 뿐이다. 이를 알기에 나는 일어나는 생각은 무시하며 언어로 해석되지 않은 진언을 온전히 외운다.
 
그렇게 원성취진언 보궐진언 보회향진언까지 외운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 이 진언을 외울 때(물론 진언을 외울 때 뿐만이 아니라 기도 하는 과정 전반에서도 마찬가지다.)는 생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냥 일어나더라도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진언을 읽는데 주의를 두며, 불쾌감이나 불편함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더 위에 문단에서 말했듯 불쾌감이 일어나면 일어나는데로 기도를 계속 해나간다.  이는 <함께한다> 고 표현할 수 있으리라. "함께하라!" 우리 국군 군종병과에선 이 말이 좌우명이다. 아주 잘 지은 문구라고 생각한다. 불쾌감이나 불편함. 구체적으로 불안 두려움 짜증 싫어하는 감정 등의 느낌이나 감정들. 그리고 생각들. 이런 정신작용은 불쾌해서 피하고 싶더라도 함께 해야 한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데로 기도수행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판단없이 바라보는 것이 앞서 말했듯 위빠사나이다. (사념처 수행이고 말이다.) 이런 느낌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거나 피하려 하면 탁구공을 물속에 넣는 것과 같아서 계속 다시 튀어올라온다. 다만 똑같은 모습으로 올라올 수도 있지만 그 모습을 바꿔서 다시 올라올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에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불쾌한 생각들을 억지로 무시하려 하고 안보려하고 피하거나 억누르려 하면 그것이 강박적인 사고와 복통이나 두통, 그리고 브레인포그처럼 머리가 먹먹해지는 것과 같은 신체증상으로 나타남을 경험했다. 해서 불쾌감이 일어날 때는 일어나면 일어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나의 기도 방법이다. 즉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불쾌하다고 일어나는 것을 없애려 하고. 또 좋다고 일어나는 것을 계속 취하려 하는 것이 아닌. 제 3의 길인 알아차림의 길. 중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알아차리고, 판단없이 바라보는 방법을 적용하여서 일어나면 일어나는 데로 '아 왔구나. 함께 나아가자.' 뭐 이런 식의 마인드로서 그냥 알아차린 뒤 하던 기도수행을 계속 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함께하는 방법은 불쾌감이나 생각뿐만이 아닌 세상 만사에 모두 적용이 가능하다. 사고팔고 특히 원증회고와 같은 괴로움이 일어날 때도 그 괴로움과 함께하고, 또 역경계인 상황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즐거움이 일어나는 순경계를 만나더라도 탐착하지 않고 즐거움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데로 계속해서 수행정진 해나가는 것이 마찬가지의 삶 속의 수행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때 일어나는 모든 경계나 정신작용들은 모두 연기(인연생기) 하는 현상이다. 그럼으로 실체가 없다. 연기하는 현상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실무허하기 때문에.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단하지 않고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상 글을 마친다.
 
책 하나랑 블로그 하나를 추천드리니 함께 봐보시길 진심으로 권합니다.
 
1. 책 : 바라는 것이 없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 / 지은이 : 묘원스님 / 출판사 : 행복한 숲
 2. 블로그 : https://blog.naver.com/tenzinpalden

마하반야바라밀.............. : 네이버 블로그

▶ 공[空]을 깨달아야 해탈한다. 무상 고 무아는 사유 관찰의 영역이요, 공[空]이 깨달음의 영역이다. ▶ 모든 수행 가운데 공[空]을 익히는 것이 최상이다. ▶ 공[空]이 해탈의 문이다. ■ 이것이

blog.naver.com

 
이 블로그는 다람살라 티벳 승가에서 공부를 하고 오신 스님이 운영하시는 블로그입니다. 저는 위빠사나를 이 블로그에서 배웠습니다. 이 블로그 정말 보물섬입니다. 감로와 같은 법문들이 정말 많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