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의 내용들의 출처 : https://blog.naver.com/psw_moon/222065670480
용수가 연기인 것을 무자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연기의 의미와 부파불교의 자성(自性) 개념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월칭은 중송 제24장 제18송 전반부를 주석하면서 연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연기는 인과 연에 의존해서 싹이나 식(識) 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성으로서 불생(생겨난 것이 아님)이다. 또한 자성으로서 불생인 사물들, 그것이 공성이다] 「도무열뇌지경」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연들에 의해서 발생한 것, 그것은 무생(無生)이다. 그것들의 발생은 자성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연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은 공(空)이라고 말한다. 공성을 아는 자는 방일하지 않는다] 「월칭석(24-18)」.
[자성을 포섭한다는 것은 시간(時)과 원인(因)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포섭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究竟의 포섭이다.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법이 자성을 포섭하지 않는 때가 없다는 것이니, 그것(法) 은 모든 시간에 自體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법이 원인이 없이도 자성을 포섭한다는 것이니, 인과 연을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자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대비바사론」, (대정 제27권, 307쪽 상)
이로부터 부파불교에서 설하는 자성은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과 중관사상에서 일체법을 무자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부파불교에서 자성이란 모든 시간에 인과 연을 기다리지 않고 실체로서 성립해 있는 것을 말하며, 중관사상은 일체법이 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수영 지음, 「중관사상의 이해」)
[출처] 중관사상에서 연기,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의 의미에 대하여|작성자 삽달마
포ː섭, 包攝
包 '쌀 포'라는 한자로, '싸다(pack)', '감싸다', '용납하다'를 뜻한다.
攝 '다스릴/잡을 섭'
3. 가명과 중도와 공
본래 空이라는 말은 결여한, 존재하지 않는 등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그런 의미를 「팔천송반야경」의 색은 공이다 라는 문구에 적용하면,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공이라고 주장하는 중관학파는 흔히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허무론 자라고 비판되었다. 그러나 일만팔천송반야경이나 이만오천송반야경 등은 색은 색의 자성에 의해서 공이다. 법은 자성에 의해서 공이다. 일체법은 자성공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반야경은 일체법이 무자성(자성의 결여와 비존재)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설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관사상도 연기인 일체법은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관사상에서 ‘공’이란 일체법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라, ‘자성의 비존재와 결여’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 이 부분을 읽고 그래서 일체유위법이 존재하는 양상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구나 라는 것이 순간 이해되었습니다. 확연히 이해되진 않았거나 제 업장이 두터워서인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눈앞에 보이는 것이 그냥 실체적으로 보이지만요.. 자성은 없지만 현상은 있다.. 자성은 없지만 현상은 있다..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아지랑이 신기루 환영 안개 무지개 헛깨비 포그스크린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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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 자세한 내용은 위 블로그를 들어가보시길 바랍니다. 링크 상단에 첨부해뒀습니다.
[출처] 중관사상에서 연기,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의 의미에 대하여|작성자 삽달마
월칭석(24-18); 또 이 자성의 공성 그것이 가명, ‘즉 연에 의한 명칭’이다. 실로 이 공성이야말로 가명(假名)이라고 확립된다. 바퀴와 같은 마차의 부분들에 의해서 마차가 알려진다. 그 자신의 부분에 의한 명칭인 것, 그것은 자성(시간과 인연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체)으로서 불생(생겨난 것이 아님)인 것이다.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이 공성이다.
실로 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이야말로 중도(中道)라고 확립된다. 왜냐하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의 존재성은 없으며,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에는 (소멸할 자성이 없어서 = 그저 인연의 모이고 흩어짐만이 있어서 = 연기한 현상만이 있어서) 소멸이 없기 때문에, 비존재성도 없기 때문이다.(불생불멸)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의 양극단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은 ‘중(中)의 길’, 즉 중도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공성과 가명과 중도는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 「프라산나파다」
[출처] 중관사상에서 연기,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의 의미에 대하여|작성자 삽달마
여기 빨간색 문장을 보니 금강경 사구게가 더 잘 이해되었습니다. 존재성이 없다. 비존재성이 없다. 존재성에 대해 찾아보니까 이렇더군요.
존재성 : 철학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특성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실재로 존재하는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연기하는 물거품(포말)같고 꿈같은 현상은 있어서 비존재도 아닌 것이 현상계의 참모습이다 이겁니다!
조금 더 잘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존재성이 없다! 비존재성도 없다!
또한 중관학파의 논사인 청목은 「중송」 제24장 제18송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청목 석(24-18); 여러 인연에서 발생한 법을 나는 空이라고 말한다. 왜인가? 여러 緣이 갖추어지고 화합해서 사물이 발생한다. 그 사물은 여러 인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다.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고, 공도 또한 공이다.
(공이라는 단어는)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假名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인연에서 발생한 법은’ 존재와 비존재의 양극단을 떠났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이 법은 무자성이기 때문에 존재라고 부르지 못한다. 또한 공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존재라고 부르지도 못한다.(이부분이 잘 저는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공이라 할 실체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존재라고 부르지도 못한다고 이해하면 되려나요? 애초에 공이란 무자성을 의미하는 단어인데요? 어렵습니다. 어쩌면 공하다고 표현을 자꾸 하니 불자들이 '공'이란 것은 실재로 존재한다고 착각할까봐 공 또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자 방편인 수단으로서 그 공은 가명이며 또한 무자성임을 용수보살님께서 말씀해주신것이려나요. 아마 그런 듯 합니다. 공이란 언어 또한 실체시 즉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인 듯 합니다.) 만일 법(연기법)에 성이나 상이 있다면, (그 자성 즉 실체는)여러 연을 기다리지 않고 존재할 것이다. 여러 연을 기다리지 않으면 법(연기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공(자성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인 법(연기하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론」
[출처] 중관사상에서 연기,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의 의미에 대하여|작성자 삽달마
-내용이 좋아서 덧붙입니다.-
Ⅴ맺음말
중관사상의 기원과 전개는 초전법륜에 의해 성립된다. 초전법륜은 불타가 깨달은 후 4제와 12연기를 설하시어 고와 고통의 덩어리인 나를 집착함을 버리고 중도와 공을 천명해 깨달음으로 이끄시는 설법이다. 이는 불타가 출현하신 인연이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연기란? 인연에 의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며, 연기하는 사실 외엔 고정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자성이란? 연기는 인연에 의해서 발생할 뿐, 고정적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자성인 것이다.
중도란? ‘고의 연기의 집착(이 부분은 '괴로움이란 현상이 발생하는 조건인 집착' 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 연기란 조건에 의존해 발생한다는 뜻이니까요.)을 소멸해서 깨달음으로 들게 하는 과정’이다.
공이란? ‘나(자아)라는 연기의 집착을 소멸해서 깨달음으로 들게 하는 과정’이다.
가명이란? 고와 나(자아)라는 연기의(조건에 의존해 발생한) 집착(자아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실체시)을 소멸해서 깨달음으로 들게 하는 과정의 수행 일부분을 의미한다, 마치 바퀴가 수레를 설명하듯이, 긴 코가 코끼리를 설명하듯이, 중도와 공은 연기의 착을 깨달음으로 이끌게 하는 대표적인 과정의 다른 명칭인 가명이라는 것이다. 연기의 발생이 곧, 중도·공·가명·무자성임을 알 수 있다.(가명은 곧 방편인듯 합니다. 집착을 없애주기 위한 방편으로서 공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가명이라고 설명하는 듯 합니다. 이 이해가 바른진 모르겠는데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중관사상의 기본개념 또한, 불타의 초기경전의 설법처럼 연기의 발생이 곧, 중도·공·가명·무자성임을 알 수 있다. 용수보살이 연기인 것을 무자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연기의 의미와 부파불교의 자성의 개념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용수보살은 연기설에 근거해서 여러 학파의 실재론을 비판하고, 일체법이 무자성·공·가명·중도라는 최고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
중관사상은 부파불교가 단상의 변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견의 사견을 완전히 부수고, 정견을 세워 바른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었다.
[출처] 중관사상에서 연기, 무자성, 공, 가명, 중도의 의미에 대하여|작성자 삽달마
이 글을 쫙 공부하고 나니 집착이 많이 사라지네요. (번뇌가 꽤 많이 사라졌음이 느껴집니다. 그간 나 그리고 나의것이라고 집착을 제가 많이 해오며 살았음이 지금 느껴집니다.)
중관학 정말 좋은 학문입니다. 제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가르침이네요 정말ㅎㅎ
위에 빨간색으로 표현해놓은 부분이 특히 다시금 읽어도 편안함을 주는 부분이네요ㅎㅎ
감사합니다.
나무 불법승
인연생기하기때문에 자성이 없어서 생하는것도 없고 멸하는것도 없다.
불생불멸이다. 해서 연기하는 현상속엔 실체가 없기에 존재성도 없고 멸할 자성도 없어서 비존재성도 없다. 그냥 진짜 꿈처럼 환영처럼 물거품처럼 그림자처럼 포그스크린처럼 존재하는 거였네요. 자성은 없고 그저 조건의 이합집산만(모이고 흩어짐)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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