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중관학

생각이란 적(Mara)의 정체를 파악했다. -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 언어를 떠나있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29. 21:33

제목 : 생각이란 적(Mara)의 정체를 파악했다. -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 언어를 떠나있다.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 현상에는 생겨났다고 이름붙일만한 실체(자성)가 없다.
 
만약 자성 스스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기에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조건과도 무관하게 존재한다.(즉 변화하는 속성이 있는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자성으로 생겨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가 없다.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 현상은 일어났다고 이름 붙일만한 실체가 없다.
 
그와 같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조건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을 살펴보면
생겨난 바가 없다. 생겨난 것이 없다.
그럼으로 조건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은 언어를 떠나있다.
그런 현상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언어로 표현되는 그 어떠한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필자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의 내용이란 하나같이 죄다
'나'와 관련되어 있고
'남'과 관련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언어'가 들어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연기하는 현상에는 이름 붙일만한 실체가 없어서
언어로는 뭐라고 결코 지칭하고 이름지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이 언어가 들어가있고, '나' 그리고 '남'과 관련된 이 생각에 빠져서
필자는 오늘 하루동안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이 생각에 빠져서 게을러지고
이 생각을 하는 즐거움에 빠져서 시간낭비하게 되고
정작 해야 할 공부와 수행과 일은 그 시간동안 하지 못하였다.
 
그럼으로 탐진치 삼독심이라던가 게으름과 같이 이 생각은 수행자를 잡아 옭아매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매우매우 악질의 번뇌라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생각이 결국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명확히 통찰된 바가, 이 생각이란 하나같이 죄다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과도 관련되어 있고 말이다.
 
오늘 이를 알아차리고, 이를 파악하고, 이를 통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알아차리고 나니
 
나의 수행의 길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옭아매서는 늪에 빠트리려드는 이 '생각'이란 마라를 
잘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깜깜한 어둠만이 있고, 
그 어둠속에서 적은 자외선 안경을 쓰고있고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내가 싸움에서 질 확률이 극도로 높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적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싸움에서는 잘 보는게 중요하다. 즉 인식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필자는 마라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마라라는 놈은 '언어'로 구성된 내용의
'언어'가 들어가 있는 내용의 생각이란 현상으로 수행자를 공격한다.
 
더 명확하게는 이 생각은 하나같이 죄다
'나'와 관련되어 있다. '남'과도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럼으로!
 
이 같은 '나'와 관련되 있거나 '남'과 관련된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간은 좋다고 계속 생각을 이어가며 시간을 헛되히 허비하고는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 이놈이 마라구나!
마라가 공격해 오는구나!
 
이를 딱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해서 마라의 유혹에 빠져서 헛되히 시간낭비 하지 않고
 
그것이 마라임을 딱 인식하고는
알아차린 뒤 다시 공부와 수행이란 자리이타적이고 자각각타적인 길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이란 이와 같다. 경계가 일어나면 인간이란 주의가 일시적으로 그 경계로 향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일시적으로 주의가 경계로 향했으면, 알아차린 뒤 다시 수행으로 돌아오는것이 수행이다.
가령 호흡명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면. 그럼 아 개소리가 들리는구나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돌아오는 것이 수행이다. 하지만 경계에 끄달린 경우 '개들끼리 싸우나?' 등의 생각을 하고는
거기에 관심을 가져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게 된다. 이렇게 경계에 끄달리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해서 수행자는 제법이 모두 연기한 것이고, 연기한 것이기에 무자성하고 공한 것을 알아서는,
색성향미촉법의 경계가 일어나서 그 육경으로 일시적으로 주의가 갔다고 하더라도,
초기경전인 바히야경에 나오듯, 볼 때는 그저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그저 듣기만 하고 생각이 일어나면 그저 일어난 생각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저 생각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그리고 나서는 다시 수행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본디 언어란 항상성이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법, 제행무상, 제법무아, 중도라는 이치와는 상반되는 실체적이고 상락아정한 특성을 가진다. 그럼으로 언어를 붙이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볼 때는 그저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그저 듣기만 하라는 것이다. 수행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하여튼 결론은 필자는 이렇게 마라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언어'가 들어가있는 생각속에 내가 빠져있음을 자각할 때면.
앞으로는 '나'라는 관념이 포함되있으며 '언어' '말' '개념'이 내포된 생각속에 내가 빠져있음을 자각할 때면.
 
'아 내가 마라의 경계에 끄달리고 있었구나.'
 
라고 스스로 자각하고 
 
더이상 시간낭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통찰을 글로 정리해 본다.
 
그리고 이 같은 통찰이 일어난 기반은 이와 같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 언어를 떠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