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꿀 수 있는건 내 마음과 내 의도뿐이다.
그 외의 대상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그럼 누구의 영역인가. 인연의 영역이다. 더 정확히는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영역이고 일이다. 그럼으로 일체유위법에 속한 경계가 발생하기 위해서 중중무진법계연기라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조건들이 형성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범부중생으로서는 예측도 불가하며 대체적으로 자신의 뜻이나 예측대로 흘러가지도 않는것이다. 세상일이란 말이다.
물론 세상일은 자신의 뜻대로 예측대로 될 때도 있고 아닐때도 있다. 그 이유는 앞서말했듯 세상일은 내게 달린 영역이 아니라 인연에 달린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 인연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중중무진법계연기를 구성하는 일체의 조건들이 모두 하나의 경계가 발생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조건들 중에서 인은 하나고 연은 나머지 조건 전체이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인은 아뢰야식에 심어진 종자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인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지을 줄 아는 앎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있어 중요한 조건이다.
필자는 이 앎이 생기니 여러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연생기법적으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이후부터 필자는 타인이나 세상일 등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어쩔 거야~" 라고 혼잣말하며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상관하지않고 신경을 끌 수 있게 되었다.
대다수 중생들이 안되는게 이것이다. 관여하지 않는 것.
내버려두는 것.
상관하지 않는 것.
신경 끄는 것.
이게 안되니 자꾸만 세상 곳곳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가령 부모 자식간의 갈등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몇년전엔 신경쓰지 않는 연습이란 책(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안남)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필자는 인연생기법적으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이후부터 필자는 타인이나 세상일 등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어쩔 거야~" 라고 혼잣말하며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상관하지않고 신경을 끌 수 있게 되었고
그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갈수록 이 이치를 현실속에서 더 잘 적용하게 되어가는 것 같고 그에 따라서 삶도 점점 더 편안해지는 것 같다.
참고로 내 수상행식도 인연의 일이다. 그런데 내 마음 바꾸는 법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위빠사나 명상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필자 블로그의 위빠사나명상 카테고리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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