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집착없이 바라고 집착없이 행하는게 중도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3. 16. 14:23

그리고 집착이 없음은 자리이타를 말한다.
집착이 없음은 연기법을 체득한 동체대비심의 상태를 말할 것이다.

집착이란 무명에서 비롯된 실체시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체시란 실체적인 대상이 있다는 생각이다.

실체시의 반대는 연기시이고 정견이다.
연기시는 공을 똑바로 보는 것이다. 일체유위법을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으로 보는것이다.

연기시는 실체적인 대상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것이다.

실체시, 집착이 없다면 특정한 생각에 빠져있지 않는것 같다.

죄다 꿈이고 환상이라고 보면 심각하게 신경쓸 대상은 없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해서 필자는 조금전 노는입에 염불하는 식으로 광명진언을 외울 때 특정한 대상 경계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조용하게 (이를 금강지라 그러나?) 입모양만 벙긋거리는식으로 진언염송하는데 걸림이 되고 특정 대상경계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 조용하게 진언을 염송하는데 걸림이 되지 않았다.

선에서는 생각이 어리석음이라 한다.
생각이 곧 실체시고 생각이 집착인 것이다.
더 정확힌 일어난 생각을 무실무허한 여몽환포영으로 보지 않고 실체시하는게 집착이 아닐까 싶다.

고로 생각이 일어나도 그걸 실체시하지 않고
가볍게(여몽환포영으로) 여기고

그저 내 수행을 노는입에 염불하듯 해나가면 수행이 잘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수행자는 바꿀 수 있는 것에 주의를 두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 수행관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과 법문들을 들으며 형성된것이고 지금도 다듬어나가는 중인데

일단 지금까지 갖춰진것만 말해보자면

내가 바꿀 수 있는건 내 마음과 삼업이다.
그 이외것. 즉 타인의 마음과 삼업은 바꿀 수 없다.

인연관적으로 내 마음과 삼업을 형성하는 인연은 내게있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과 삼업을 형성하는 인은 오직 상대에게만 있고 연은 중중무진법계연기 전체이며 그 불가해를 넘어서는 수많은 간접적인 조건 중 나는 작디작은 한 티끌과같은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변화는 자각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고로 설령 내가 영향을 주더라도 결국 간접적인 조건 수준일뿐이며 직접적인 변화는 상대의 자각에서 비롯된 의업에서 구업과 신업으로 이어지는 흐름일 수 밖에는 없다.

고로 결국 타인은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영역이다.

수행자는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서

내가 바꿀수있는건 나 자신. 내 마음과 내 삼업뿐임을 알고서

내 신수심법(특히 느낌)을 판단없이 바라보고 계정혜 삼학, 염불 주력 독경, 육바라밀등 수행을 닦아나가며 내가 할 수 있는걸 해나가면서 지악 수선 청정(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의 길을 나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 기도든 무엇이든 실체없음을 바라보며 행하면 편안한 것 같다.

+ 걸레질을 할 때 실체시를 하여 '더러운 것'을 닦는단 생각으로 닦으면 힘들지만 그런 실체시 없이 걸레질을 하면 편안한 것 같다. 걸레란 생각도 없이, 더러운 것이란 생각도 없이, 나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전반적으로 문질러준다고 생각하고 하다보면 대걸레질이든 걸레질이든 발우공양시 김치조각으로 그릇을 닦는것이든간에 금새 어느새인가 깨끗해져있는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생각이 실체시요 생각이 집착이며 생각이 어리석음인 것 같다. 더 정확힌 생각을 실체시 하는게 집착이고 사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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