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불안과 두려움과 미움이란 것은 오온 중 '수' 즉 느낌에 해당하는 현상들임을 인식한다.
2. 이 불안과 두려움과 미움이란 느낌이 실체가 없음을 안다.
3. 불안과 두려움과 미움이 일어나는 대상이 실체가 없음을 안다.
4.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뚱이와 정신작용에는 실체가 없음을 안다.
5. 제법이 공함(실체가 없음)을 안다. (제법공상을 안다. 일체개공을 안다.)
필자는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마하 = 공한 실상.
반야 = 연기하는 현상에는 (언어로 만들 수 있는 이름을 붙일 만한) 실체가 없을 아는 견해.
바라밀 = 공한 실상을 체득하기 위해 나아감.
바라밀다 = 이미 원만구족함. 이미 제법무자성이고 제법이 공하여 이미 원만구족함. 해서 가고 올 것도 없음. 불래불거임.
그럼으로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미움 등의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그 느낌을 회피하거나 없애려고 하는 등 억지로 무시하고 억제하려 하면 그 느낌은 아뢰야식으로 다시 숨었다가, 조건이 갖춰지면 다시금 일어나지만
그 느낌을 판단없이 바라봐주면 그 느낌은 일어났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념처 수행이다. 이렇게 느낌을 판단 없이 바라봐주는 수행을 하면 느낌의 욕구인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알아차려주기를 응시해주기를 바라는 그 욕구가 충족되었음으로 그 느낌이란 아이가 만족하여 사라진다.
그럼으로 그 느낌이란 아이에게 거부감을 가지면 안된다. 거부감 대신 자애심을 가져야 한다. 자애명상을 할 때의 마음을 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자애심(과 연민심)을 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애심을 바탕으로서. 그 자애심으로서 그 느낌이란 아이를 바라봐주는 것이 느낌을 단순히 없애기 위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번뇌에서 해탈하는 목표를 성취함에 있어서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기심을 가지면 자꾸 외부로부터 도피하려하고 싸울 생각을 하게 되고 벽을 만들게 되고 숨게 된다. 이 이기심과 반대의 마음은 이타주의다. 이타심이다. 이 이타심을 나는 달라이라마 존자에게 배웠다. 이 이타심을 내는 것은 이기심을 경감시켜주고 감소시켜준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해서 달라이라마께서는 아침마다 공성과 보리심이란 두 수행을 하시는데, 이 보리심 수행에서 달라이라마는 이와 같은 구절을 암송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우주가 존재하고, 중생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 달라이라마 -
달라이라마존자께서는 이 구절 하나가 효과가 매우 강력하다고 가르쳐주셨다.
이 이타주의 명상. 이 이타심. 이 자애심을 낸다는 것은 결국 이기심(이기주의) 이란 업장을 없애주며,
수용하고 허용하게 될 것이다. (받아들임이란 책도 있지 않던가?)
필자는(나는) 이 방법으로 미움을 극복하고 대립과 갈등과 분별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자애심과 연민심. 이타심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예기하고 싶었다. 이 같은 이타주의적이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 곧 허용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이기적인 마음을 내는 것이 곧 거부감을 갖는 것이고 분노이고 싸우려는 마음이고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중생은 다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바라봐주고 인정받고 존중받고싶어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러한 중생의 특성을 중생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인 느낌이란 중생의 일부분 역시도 띄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비심과 이타심을 가지고 이 (두려움, 불안, 불쾌감, 짜증, 슬픔, 분노, 즐거움 등의) 느낌이란 아이들이 올라올 때 이 아이들을 바라봐주는 것이 결국 이 느낌이란 아이들의 욕구를 해소해주고 원과 한을 풀어주는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아닌 어떤 중생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게 원과 한이 충족되고 해소되어야만 만족해서 떠나갈 것이다.
반대로 일어나는 느낌 생각 감정을 억제하려하고 무시하고 그저 안봐버리려고 회피하고 다른 자극적인 곳 즐거움을 주는 곳(술, 게임, 쇼츠, 음란물 등등....... 범부 중생들이 빠지는 것들)으로 눈을 돌리면 이 느낌이란 아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6식으로 조건이 되어 올라온 아이들은 그렇게 회피하거나 억제하려 하면 8식이란 깊은 무의식으로 다시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조건이 형성되면 다시금 6식이란 표면 의식으로 떠올라온다. 다시금 일어난다.
그럼으로 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두려움 불안 미움 등의 느낌 감정들에 대하여 (자애심과 이타심을 가지고 판단 없이 바라봐주는) 수념처 수행을 자꾸자꾸 하다보면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느낌 감정의 빈도수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업장소멸의 과정이다.
근데 수념처 수행에 있어서 주의할 점은 이 일어나는 두려움 불안 미움 등의 느낌이 '가짜'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인연생기하는 현상들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
그럼으로 이름 붙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상에는 말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무명에 빠져서 실체시를 하며, 이분법이란 특성을 지닌 언어로 이름붙이기를 잘한다. 중생들의 생각은 그래서 온통 언어로 구성되어있다. 중생들은 이 같은 생각이란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갈등이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이 전도몽상이고, 중관학파에서는 이 생각을 희론이라고 부른다. (희론은 번뇌란 뜻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아는 한 큰 스님께서는 생각이 번뇌고 생각이 어리석음이라고 말씀해주셨다.
해서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인연생기하는 현상들은 모두 이름붙일 실체가 없는데 눈귀코혀몸의식으로 인식되는 그 현상이 파노라마처럼 풍경처럼 흘러가기에, 이 같은 현상은 이름붙일만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꿈과 다를바 없고, 환상과 다를 바 없고, 물거품과 다를 바 없고, 그림자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 같은 현상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고정불변한 특성이 없어서 항상 매 순간 순간 변화하기에. 한시도 멈춰있지 않기에. 아침해가 뜨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이슬과 다를 바 없고, 일순간 찰나지간에 번쩍이며 찰나지간에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번개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이를 한문으로 이렇게 말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그 뒤에 나오는 가르침은 '응작여시관' 이다.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바라보라.)
라는 뜻이라고 알고 있다.
합치면 이러하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풀이하자면
일체의 인연생기하는 모든 현상들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 번개와 같다. 응당 이렇게 관하라.
이와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해서 이와 같은 금강경에 나오는 사구게(네 구절로 된 게송 -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자면,
결국 이 느낌이란 현상 역시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와 같은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꿈도 환상도 물거품도 그림자도 조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들에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알갱이(실체)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럼으로 느낌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중생은 일어나는 느낌에게 불안이라고 이름붙이고 분노라고 이름붙이고 미움이라고 이름붙이고 두려움이라고 이름붙이지만
실상은 불안이라 할 것이 없는 것이고
두려움이라 할 것이 없는 것이고
분노라고 미움이라고 증오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즐거움이라 할 것이 없는것이다.
즉 느낌이라 할 것이 없는것이다.
(그럼으로 이 느낌을 거짓이라고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반야일 것이다.)
그리고 느낌뿐만이 아니다. 물질현상도. 생각현상도. 충동과 의도 현상도. 의식과 무의식이란 현상도 모두 그 이름(물질, 생각, 의도, 의식과 무의식)에 해당하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물질에서의 이 같은 이치를 양자역학이 잘 설명해준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불교의 좋은 친구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물질들을 분석해보면 끝끝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란 찾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이 이제 불교의 가르침을 증명해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를 반야심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해놓았다.
색즉시공, 수상행식 역부여시.
(앞서 예기한 것은 오온이 공함을 보는 견해입니다. 헌데 이것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공함이 오온으로 나타남을 아는 견해인 공즉시색의 견해 역시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까지 다 안다해도 그게 끝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 더 남은 것 같습니다. 근데 그 하나는 저도 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 못드립니다. 다만 하나 더 알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를 시안(?)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읽은 내용이라 제 기억이 명확치 않아서 단어 옆에 물음표를 붙였습니다. 이 시안이라는 표현은 월호스님의 <아바타라 안심이다>라는 책에서 보게 된 내용입니다. 근데 저는 이걸 읽어봐도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더 공부하고 수행하고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금강경에서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이렇게 다섯가지 안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안이란 것은 불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그렇게 나와요. 제가 아는건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제가 안다고 말씀드리는 건 그냥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체득을 해야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깐 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지식적으로 이해한 것이지 체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진짜로 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준임을 밝힙니다. 참고로 월호스님 법문 중에는 금강경은 색즉시공을 예기하는 경이며, 반대로 화엄경과 능엄경은 공즉시색을 예기하는 경이라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월호스님 법문을 참고해보시길 바랍니다. 저도 몇개 안봤지만, 제가 본 월호스님 법문과 불서들은 다 재밌었습니다. 참고로 월호스님 유퀴즈에도 나오셨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앞서 여기까지 말했다.
해서 이 느낌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고.
이 느낌이 위와 같은 원리로서 가짜임을 알면서 바라봐야 한다.
가짜임을 안다는 것은 판단 분별할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단 없이. 가짜임을 알면서 바라보는 것이다.
일어나는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느낌을 말이다.
그리고 오늘 필자가 실험해본 것인데 그 일어나는 불안과, 불안이나 두려움이 일어나는 대상에 대고 마하 반야 바라밀 이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위에 써놓은 마하반야바라밀 풀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즉, 일어나는 불안이나, 외부대상이나, 나 자신이 이렇다 이름붙일만한 실체가 없음을 새겨본것이고 사유해본것이다. 그와 같은 사유를 하면서 실체가 없음을 관한 것이다. 이를 생각한 것이고 머리로 그려본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과 불안 등의 느낌이 사라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반야심경에서는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이라고 나온다.
이 구절을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전도된 헛된(실체없는) 망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
이렇게 해석하는 걸로 알고 있다.
결국 이 가르침이 앞서 필자가 쭉 말한 내용을 함축해놓은 내용이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약정리하자면, 결국 불안 두려움 미움 등의 느낌은 업장들이고, 이런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의 스텐다드는 (위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것 등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스텐다드. 즉 필자가 생각하는 기본은) 이 느낌들이 가짜임을 알고서 판단없이 바라보는 것.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불안이 일어나면 불안을 허용하고 충분히 알아차리고 바라봐주는 것이다. 허용한다는 것은 내 심신에 불안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느낌을 판단없이 바라보고 알아차린다면 불안 등의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 불안 등의 느낌 때문에 전전긍긍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일어나는 느낌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불안등의 느낌 감정들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억제하지 않고 수용해서 심신에 불안등의 느낌들이 일어날지라도 혼란해하지 않으며 다만 또렷이 깨어있으면서 불안 등의 느낌들을 바라보는 깨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상태를 통해 우리는 오온은 연기하는 현상이지 내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불법승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 반야 바라밀~
'연구 > 불안과 두려움 현상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이 일어나면 억제하면 안 된다. (0) | 2025.02.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