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일어나면 억제하면 안 된다.
자꾸 억제하면 그 불안이 내 경우 신체증상으로 나타나더라.
해서 불안이 일어나면 억제하지 말고 일어나는 그 불안을 바라봐줘야 한다.
불안과 두려움은 느낌이니 이 느낌을 대상으로 판단 없이 바라봐주는 수념처 수행을 해 줘야 한다.
그리고 만약 불안을 나도 모르게 억제하려다가 신체증상으로 불안이 나타났다면
그렇게 증상이 나타난 부위를 판단없이 바라봐주는 신념처 수행을 해야 한다.
심신은 불이이다. 둘이 아닌지라,
느낌등의 감정이 신체증상을 동반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긴장하면 설사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해서 신체증상과 동반되어 느낌이 일어난다면,
특히 그 증상이 나타나는 신체 부위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이마, 가슴 등의 부위가 그런 부위이다.
이 때는 이 부분을 가만히 판단 없이 바라봐주는, 알아차려주는 신념처 수행이 필요하며
방편으로서 그 부분에 손을 같다대 주고 있어 주면 효과적이다.
심리학적으로는 내 내면아이가 불안해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임으로,
그 불안이 일어날 때 동반되는 답답하거나 통증이 일어나는 신체부위에 손을 대주고
그 아이를 안아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손을 대며 신념처수행을 하다 보면 불안이 어느샌가 사라져 있을 것이다. 신체증상 역시 사라져 있을 것이다.
더불어 호흡을 관찰하는 수식관 - 신념처 수행 역시 좋은 것 같다. 들숨 날숨을 관찰하는 것.
그리고 마음챙김 명상 등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도 불안장애 환자들에게 사용하는 치료기법이다.
불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신건강의학계와 심리학계에서 최신 사용되고 있는 기법들이 MBSR (마음챙김명상)과 CBT(수용전념치료)라고 알고 있다.
보다 더 공부를 해봐야겠다.
이 글의 요지는
억제하고 억압하면 안 되고
잘 바라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두 팔 벌리고 안아달라고 오는데 무시해 버리면 그 아이는 상처를 받는다.
불안이나 두려움은 아이와 같다. 나를 찾아온 아이.
아이들의 특성은 자신을 알아주고 사랑해 주길 원하고 이해해 주길 원한다.
불안과 두려움은 오온중 수이다. 느낌이다.
결국 이 느낌을 비롯한 색수상행식이 가화합한것을 중생이라 이름한다.
결국 그 중생의 일부가 느낌인 것이다.
중생들은 저마다 동일한 욕구가 있다.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자신을 위해주기를 바란다는 욕구 말이다.
중생이 이 같은 욕구가 있듯, 중생의 일부분인 느낌 역시도 이 같은 욕구를 같는 것은 천태교관의 일념삼천이란 교설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일 것이다.
해서 느낌은 회피하려 하고 무시하려 하거나 억압하고 억제하려 하면 안 된다.
아무리 탁구공을 물속으로 집어넣어도
탁구공은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다.
물론 느낌이 탁구공과 같지는 않다.
다만 이 느낌이란 아이는 억압하고 억제하려 하면 잠시간 억눌러질지도 모른다. 이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이는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불안 두려움 등의 느낌이 무의식 즉 아뢰야식의 영역으로 잠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해서 조건이 형성되면 불안 두려움 등의 느낌은 다시금 6식인 의식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럼으로 이 불안이나 두려움이란 아이들(느낌의 집합에 해당되는)은 억제하고 억압하고 회피하고 무시하려 하면 안 된다.
도리어 바라봐줘야 한다.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직시해야 한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줘야 한다.
중생들은 자신들을 바라봐주길 원하고. 알아주길 원한다. 허용해주고 수용해주길 원한다.
오온 각각에 해당하는 현상들 역시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으로 중도적으로 알아차려줘야 하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해줘야 한다.
그리고 자애심을 가져주면 좋다. 그렇게 알아차려주는 것은 취하려 함도 아니오 없애려 함도 아니다.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떠난 제3의 길이 알아차림이고 바라봄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걸어가셨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길이다. 이 길을 중도라고 한다.
해서 판단 없이 바라봐줘야 한다.
판단이 없으려면 제법공상을 교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중관학을 공부해야 한다. 더불어 반야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공부해서 강의할 수 있을 수준이 된다면 좋을 것이다.
해서 세간적으로 현상을 바라볼 때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세간적 반야바라밀이다.
다음 법문들을 참고 바란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한 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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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을 익히는 두가지 방법!!! 반야바라밀을 닦는 법은 무엇인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닦는다라는 것은 공[空]을 익히는 것을 말합니다. 공[空]을 익히는 방법은 두가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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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수행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꼭 익혀야할 수행법!!!
인간은 끊임없이 판단한다. 불교에서는 판단을 분별이라고 하는데... 좋다 또는 싫다라고 이분법적으로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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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중생들은 이 같은 불편한 감정을 대할 때 이 같은 술을 진탕 마시던가 게임을 한다던가 만화를 본다던가 자극적인 무언가를 찾아서, 그 자극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이 같은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려 한다.
아니면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날 때 분노를 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
해서 그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나는 대상에 분노를 해서 그 대상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왁! 하고 화를 내서 그 대상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면 안심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아마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 방식은 좋지 않다. 원한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보란 내가 행한 만큼만 딱 돌아오는 1:1의 구조가 아니다. 물리학적으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1:1의 에너지가 오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업인과보의 법칙은........ 물론 1:1이긴 하다. 그러나 그 대상에 따라서 돌아오는 과보의 크기가 다르다. 축생에게 행한 악업과 악인에게 행한 악업과 선인에게 행한 악업과 오계를 받은 불자에게 행한 과보와 도과를 이룬 스님들께 한과보와 아라한과를 얻은 분께 행한 악업의 과보와 부처님께 행한 악업의 과보는 모두 다 그 크기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악인에게 악업을 지어도 1000배로 돌아오는 게 업인과보의 법칙이다.
그럼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날 때 대상경계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만 잔뜩 끼칠 뿐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일시적으로는 편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씨앗을 겨울에 심으면 바로 싹이 나진 않는다. 봄이 되고. 적당한 온도가 갖춰지고. 적당한 수분과. 햇빛과. 양분이 갖춰져야 싹이 난다. 이와 같이 자신이 행한 악업. 누군가를 괴롭히고 해코지하거나 생명을 앗아간 그 악업의 과보는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엔 없다. 그리고 이 법칙이 또 눈덩이와 같아서 더 나중에 받을수록 눈덩이가 더 내리막길에서 커지듯, 이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쌓이고 가중되듯, 이 같은 법칙이 적용되서 더 나중에 그 과보를 받을수록 그 과보가 더 크게 나타나게 된다.
그럼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날 때 분노를 하고 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자신게 손해만 되는 것임을. 자리이타와는 반대되는 자해타해적인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불편한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느낌을 회피하려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님을 앞서 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그렇다면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느낌을 대하는 자세는 앞서 말했듯
판단 없이 바라봐주는 것일 것이다.
바로 수념처 수행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수념처 수행을 할 때 불안과 두려움 등의 느낌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불안과 두려움을 바라봐줄 때 이 아이들의 원도 풀린다. 원이 풀려야 떠나간다 이 아이들은.
귀신이 등장하는 이야기들 역시 같은 패턴 아니던가. 그 귀신의 원이나 한이 풀려야 떠나가지 않던가.
이 불안과 두려움이란 아이들 역시 원을 풀어줘야 한다. 충분히 바라봐주고 충분히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그 방법이 수념처 수행이다.
그리고 요즘 실험하고 있는 것이
이렇게 수념처 수행을 하면서 동시에 그 불안에 대고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등의 진언을 염송해주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만 해봐도 되고 입으로 소리내어 해봐도 된다.
오늘 조금 이 방식을 실험해보았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불안이 이 방식을 취할 때 더 빨리 없어지더라.
이런 식으로 불안을 바라봐줄 때
불안의 생멸을 관찰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불안은 8식(아뢰야식)으로 다시 숨어버리지 않고 원이 풀려 떠나가니
점차적으로 불안이 일어나는 빈도수는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업장소멸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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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 네이버 블로그
▶ 공[空]을 깨달아야 해탈한다. 무상 고 무아는 사유 관찰의 영역이요, 공[空]이 깨달음의 영역이다. ▶ 모든 수행 가운데 공[空]을 익히는 것이 최상이다. ▶ 공[空]이 해탈의 문이다. ■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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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의 법문들을 보면서 배운 것이다.
이 블로그 좋은 블로그이다.
그리고 다른 스승께 필자가 배운 바는
알아차리면 업이 안되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업으로 8식(아뢰야식)에 저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앞서 쓴 내용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업장소멸은...... 이 수념처수행을 일상생활 속에서 하면서
근본적인 업장소멸은 독경 염불 주력 절 사경 참선 등등 불교의 수행을 해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바라밀도 닦고 말이다. 계를 잘 지키면서 말이다. 스님들의 경우는 계율을 잘 지키면서 말이다.
결국 복과 지혜를 계속해서 닦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혜도 밝아지고 복도 쌓이며
심해탈과 혜해탈을 경험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
불안 두려움 미움 분노 짜증 시기 질투심 인색함 화 이런 느낌들(감정들)은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은 8식이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경계 똑같은 대상을 마주해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누군가는 화를 내지만 같은 상황을 마주한 누군가는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럼으로 결국 바꿀 것은 자신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가르침을 주는 종교가 불교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시길 바란다.
종교란 마루종자에 가르칠교 자를 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종교란 말 일본인 학자가 만든 말이다.
이 종교는 동양적인 개념이다. 필자도 잘 모르지만, 서양의 릴리전과 동양의 종교란 개념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도 잘 이 내용을 모름으로,,,,, 차치하고.
다만 이건 안다. 결국 종교란 불교라는 것을 말이다.
행복은 지금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다.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할 이유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서 내가 주인되어 행복할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불교는 상황이 어떠하든 그 상황과는 관계 없이 괴로움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인 것이다.
(이외의 다른 종교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양의 릴리전에는 해당하겠지만
종교란 표현에는 적합하지 않지 않겠는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여서.. 본론으로 돌아가서.
상황에 분노하지 않고. 상황을 구성하는 대상, 경계를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길 바란다.
결국 앞서 한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고 타인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다.
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해서 이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가 생길 때
상황이 어떠하든 괴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해서 대행큰스님은 이 같은 가르침을 설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은 안으로 돌립니다.
그럼 어떻게 안으로 돌릴까?
한발 더 나아가보자.
필자는 이걸 찾는데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방법을 필자는
생각이 길이다
아바타라 안심이다
성난 물소 길들이기
시끄러운 원숭이 잠재우기
하루 1분 마음 챙김
금강반야바라밀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중론
대방광불화엄경
이 같은 불서들과 불경들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아잔브람스님의 책 성난 물소 길들이기가 참 좋은 책이었다.
물론 다른 책들도 다 좋은 책들이었다. 이 책들 하나하나가 필자가 안으로 돌리는 방법을 찾게 해 준 조건들이었다. 그럼으로 위의 참고목록에서 이 책들과 경들은 단 한 권도 빼놓을 수가 없다.
해서 필자가 찾은 안으로 돌리는 방법은 이것이다.
0. 제법공상이라고 관찰하기(=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반야바라밀)
1. 관여하지 않기
2. 내버려두기
(즉 0,1,2번을 하는 것은 가짜이고 허구이고 허깨비라고 관찰하고 관여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관심을 꺼버리는 것이다.)
3. 수행에 집중하기(=내 할 일에 집중하기=불교공부하기=스스로의 마음을 성찰하기. 인연관하기. 일기쓰기.)
3-1) 내 심신에서 일어나는 현상 판단 없이 바라보기 = 사념처수행. 신수심법 관찰 위빠사나 수행
3-2) 염불 독경 주력 참선 예불 절....
3-3) 보시 지계 인욕 정진
( 3-3을 하다 보면 선정에 들고 그렇게 정학을 닦다 보면 지혜가 밝아진다. )
여기에 추가적으로 덧붙이겠다.
위에서는 0~3까지를 말했다.
이는 공성의 측면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는 양 날개가 있어야 하늘을 날 수 있다.
수레도 양 바퀴가 있어야 구를 수 있다.
사람도 두 다리가 있어야 뛸 수 있다.
그럼으로 사실 앞서 언급한 내용에는 한 가지 방법이 결여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여된 나머지 한가지 방법은 바로 이타주의다. 연민심과 자애심을 기르는 수행이다.
이기심은 이타심을 낼 때 사라진다. 달라이라마 존자의 가르침이다.
자세한 가르침은 이 영상을 참고해 보시길 바란다.
<위 영상을 찾게 된 법문이 담긴 링크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좋은 블로그에 실려있는 법문입니다.>
https://blog.naver.com/tenzinpalden/222571829399?trackingCode=external
★보리심과 공성을 같이 수행하면 강력한 힘이 있어 이기심을 없애고 이타심을 늘린다-달라이라
아래 동영상은 자막을 넣어서 보기 정말 편하고 좋습니다. 더욱 좋은 것은 내용이죠. 정말 명설법입니다. ...
blog.naver.com
그리고 다음은 위의 영상에서 필자가 인상 깊었던 내용을 정리해 놓은 글이다.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6621
☆달라이라마존자께서 매일 하시는 두 가지 수행은? (강한 자아를 줄이기 위해 달라이라마께서
https://blog.naver.com/tenzinpalden/222571829399?trackingCode=external ★보리심과 공성을 같이 수행하면 강력한 힘이 있어 이기심을 없애고 이타심을 늘린다-달라이라아래 동영상은 자막을 넣어서 보기 정말 편
findthebrightroad.tistory.com
그럼으로 결국 이타심을 키우는 수행까지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필자는.... 나는 이를 느꼈다.
재가자로 수행을 해나가면서 부딪힌 벽이 있었다. 미움이란 벽이다.
나를 많이 괴롭히고 해치는 사람들을 만났다.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대화는 소용이 없었다. 재차 시도해보았다. 소용없었다. 다시금 시도해보았다. 소용없었다. 말이 안통하는 사람들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잔뜩 미움이 쌓였었다. 내가 처한 조건상 이 사람들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이 사람들의 괴롭힘을 피할 수도 없었다.
해서 장장 일 년 이상의 시간을 괴로워하며 지냈다.
그러다 최근 이 벽을 부숴버릴 방법을 찾았다.
물론 상대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럼 돌아올 과보는 최소 1000배다.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은 과거생에 나의 어머니 아니었고 아버지 아니었으며 형제자매 아니었던 중생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독립돼있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란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라고 할 만한 실체조차도 없다는 것을.
결국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체라는 사실을.
이 같은 이치를 새기고 또 새겨봐야 한다.
그래야 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악이란 십악업에 속하는 행위이며, 선이란 십선업에 속하는 행위를 말한다.)
해서 최근에서야 찾은 이 벽을 부숴버릴 방법이자,
공성과 더불어 다른 하나의 날개란 바로 이타주의이다. 앞서 말했던.....
이타주의.
달라이라마 존자께서는 매일 아침마다 보리심과 공성 두 측면에 해당하는 수행을 하신다고 한다. (위의 영상에 나오는 예기다.)
필자가 위 영상에서 특히 와닿은 내용은
저는 일어나자마자 항상 한 가지 소절을 암송합니다.
이 우주가 존재하고, 중생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 달라이라마 -
이 내용이다.
이 가르침을 듣고 필자도 이 명상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을 보고 난 뒤 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존재의의는 섬기는 것인가 보다. 모든 생명을. 그들이 사실 모두 다 나와 동체이고, 그들은 모두 사실 다 과거생에 내 부모님이었고 형제자매였을테니. 그들은 모두 내가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돕는 조력자들이니. 미운놈이 없음 인욕수행할수도 없으니.
내 존재의의는 모든 생명들을 섬기는 것인가보다. 모든 생명들을.. 원수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을......
이 이타주의 명상. 이 같은 달라이라마께서 가르쳐주신 자비심 그리고 보리심에 해당하는 명상.
이것이 내가 찾은 당면한 벽을 뚫을 수 있는 장비였고
당면한 경계가 더 이상 걸림이 되지 않게끔 해주는 마법의 주문이었고
당면한 역경계에서 해탈할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 이타주의 명상은 지혜(공성)와 더불어 수레의 다른 쪽 바퀴이며, 새의 다른 한쪽 날개이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이다.
결국 여기에 답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마음 심(心) 자이다.)
결국 답은 지혜와 자비에.
마음에 있다.
그럼으로 기억하자.
1. 제법공상으로 관하자. 실상은 있다고 할 것이 없다. 그저 풍경이 흘러갈 뿐이다. 꿈이 환영이 흘러갈 뿐이다. 해서 실체시하지 말자. 분별하지 말자. 판단하지 말자.
2. 관여하지 말자.
3. 내버려 두자.
4. 내 수행에 집중하자.
그리고
5. 제법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을지라도, 그런 환영(환상)들을 구하고자 하는 자애심과 연민심을 내자.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아서. 그리고 하나라고 할 실체가 없음을 알아서. 오온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환영과 같은 중생들을. 비록 실체 없는 환영이지만. 실체없는 현상에 불과하지만. 그런 현상. 그런 환영인 중생들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내자.
왜냐하면 그들과 나는 동체이기 때문이다.(인드라망, 중중무진법계연기)
또한 그들은 모두 과거생에 나의 부모님이었고 형제자매였기도 하며 친척이었고 조상님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의 본래의 마음은 자애심이며 연민심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내 본래의 마음이 문득문득 드러날 때 나는 느낀다.
다른 생명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함이 느껴지고(=자애심)
다른 생명이 괴로워할 때, 고통스러워할 때 그 다른 생명의 괴로움과 고통을 나 자신으로 미루어 짐착하여 공감하고 연민하게 된다(=연민심).
이 자애심과 연민심을 줄여서 자비라고 한다.
우리 불자들은 모두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모두 대자대비하신 분들이시다.
이 대자대비심을 갖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갖는다는 표현보다는 찾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리라.
여하튼 우리는 끊임없이 정진하여야 하리라.
나무 관세음보살 마하살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