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천태교관(천태 조사께 배우는 불교교리)

나(자아)를 세우니 원수의 존재감도 강해진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3. 13. 00:36

그래서 윤회가 발생하나보다.

 

내가 불교를 모를 적에는 나는 꿈속에서 살아왔다.

물론 지금도 꿈속에서 살고 있지만,

불교를 모를때는 오로지 이분법의 관념속에서 내가 (소년만화 속의 주인공과 같은) 주인공이 되고 승리자가 되고자 하며 살아왔다.

그 과정 속에서 고락의 파동이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락 상하곡선을 그리는 삶을 살아왔다.

 

요즘에는 불교를 공부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고 있었지만,

오늘 문득 노래를 듣고 싶었고, 노래를 들으니 번뇌가 생겼다.

노래로서 자신의 동기를 유발해서, 스스로를 드라마 속의 주인공과 같이 여기고 싶고, 

강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게 게임도 안된다고 여기고 싶고.

뭐 그런. 자아를 높이 치켜세우고 나는 특별하다 나는 잘났다 라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그래서 노래를 들으니 되려 역으로 원수가 많이 생각나더라. 

 

노래를 그만 듣고 밖으로 나가서 조금 정신을 환기하니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자아를 강화하려 하면 그에 상반되는 원수의 자아 역시 강해지는 시스템.

그것이 중생들의 세계, 희론의 세계, 이분법의 세계구나.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나는 오늘 노래를 들으며 자아를 강화하려 하니

세상에서 내 자아. 내가 쌓아놓은 것(실상적으로는 꿈속의 모래성과 같은 것일 뿐이지만.)을 무너뜨리려는,

나의 자아에 위협이 되는 대상들의 존재감도 강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바로 원수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경쟁자들의 존재감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나를 세우니 나도 생기지만 동시에 상대가 생기는 것이었다.

 

이는 공덕천과 흑암천이 같이 오는 이치를 경험한 것이리라.

 

이를 천태교관에서는 원융이라 한다.

원융은 본래 공가중이 함께 찾아오는 것. 함께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천태교관에서 원융을 쉽게 설명하자면 좋은 것과 나쁜 것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함께 오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원융의 시스템은 희론에 빠지고 분별 망상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원융의 도리. 좋은 것과 나쁜 것(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함께 찾아오며, 공덕천과 흑암천이 함께 찾아오는 이 원융의 도리로 인하여 락이 있음 이후 고가 있고, 고가 있음 이후 락이 있는 이 고락이 반복되는 이 윤회가 발생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윤회에서, 아 이분법적인 고락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려면 어찌 해야 할까?

 

결국 그 방법은 무명 망념에서 벗어나는 길을 수행의 길(자리이타의 길)을 걷는 것이리라.

 

팔정도의 시작은 정견이지 않은가.

 

일단 똑바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팔정도를 하나하나 모두 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팔정도를 앞축하면 계정혜 삼학이니 계정혜 삼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나 우리는 대승불자이니 육바라밀을 닦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송 사경 주력 염불 참선 절및 예불 등등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꾸준하게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법문도 많이 듣고 불교 공부도 많이 하고 말이다

 

그렇게 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꿈속에서 살고 있지만 적어도 자신이 꿈속에서 환상속에서 물거품속에서 그림자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꿈을 꿈으로 보고 환상을 환상으로 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이리라.

무명 망념에서 벗어나서 현상을 실체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체유위법은. 그러니깐 일체의 인연생기하는 현상은 독립적으며 고정불변하게 존재하는 실체 즉 자성이 없음으로

실체시를 하지 않고, 연기법과 무자성하며 공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바르게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앞서 말한 팔정도 삼학 육바라밀 등의 수행들을 열심히 함께 닦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제법의 실상인 일체개공을 똑바로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해야 할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일즉다다즉일과 인드라망의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불이법의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해서 실상적으로는 나와 남이라고 구분지을 실체가 없고

모두가 하나임을 알아야 할 것이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실상은 하나라고 할 것 조차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계는 현상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만이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해서 결국 하나의 허공의 꽃이 피어있다는 것임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수행정진하며 세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밝히는 방법은 자신을 밝히는 것이다.

심청정 국토청정이니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청정은 공을 뜻하는 말이다.)

세상도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맑히면 세상도 맑아지고

자신의 마음을 밝히면 세상도 밝아지는 것이다.

 

일즉다 다즉일이다. 인드라망이다. 그럼으로 모든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나의 안에 일체중생 삼라만상이 들어있고, 다른 이으 마음에도 나를 비롯한 일체중생과 삼라만상이 들어있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성과 상호침투성을 표현해주는 말이 바로 일즉다다즉일이고 인드라망이다. 우리는 사실 하나인 것이다. 실상적 차원, 출세간적 차원에서 볼 때는 말이다. 하나는 모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출세간적으로.

 

만약 연결되있지 않고, 의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침투성이 없다면.

그렇게 연결되지 않은 실체적 존재. 그러니깐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존재는.

애초에 불교 교리상 존재할 수가 없지만. 만약 있다고 가정해도.

이 현상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인식하는것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실체는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제법이 모두 공하다. 제법개공이고 일체개공이고 아공법공이다.

결국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해서 연기법과 공과 중도를 체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를 세우니 원수의 존재감도 강해지는 이 원융의 프리즘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꿈같은 세계속에서의 중생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노래는 그만 듣고 이제 내 할일을 해야겠다.

 

윤회에서 나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지만,

적어도 윤회의 고락의 파장을 강화시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오늘 노래를 들은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ㅋㅋ

 

아니. 원융이었다. 이 역시 원융이었다. 

노래를 들었기에 번뇌가 일었다. 시간낭비도 했다.

그러나 이 번뇌가 일어서 이후 차분히 노래를 그만 듣고 나가서 좀 걸으니 이 같은 통찰이 생겼고

이 통찰을 글로 풀어보니 통찰이 더 세세하고 명료해졌다.

 

이 같은 이치를 천태교관에서는 번뇌즉보리라고 한다.

 

결국 번뇌라는 '나쁜 것' 은 '보리' 라는 요소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공덕천은 항상 흑암천과 함께 찾아온다.

그러니 마찬가지의 이치로 흑암천이 찾아왔을 때는 그 옆에 공덕천이 늘 함께 같이 오는 것이다.

 

원융.........

 

여하튼 이제 글을 마치고, 

할일 하러 가봐야겠다.

 

이상. 글을 마치겠습니다.

 

 

나무 불법승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