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실체시 할 때 원융(상의성)이 발생한다. 그 실체시한 것을 탐착하면 고과가 따라온다. 그럼으로 근본적으로 실체시하게된 대상의 공성을 꽤뚫어 알자.
실체시 할 때 공덕천과 흑암천이 발생한다.
실체시 할 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발생한다.
이 두가지는 함께 온다.
다만 시간차는 있다.
탐진치는 삼독이라 그런다.
세가지 독극물과 같다는 것이다.
탐욕의 비유는 칼날에 발린 꿀과 같다고 한다.
꿀을 핧는 즐거움은 찰나지간이오, 그 찰나지간 이후에는 혀가 잘린다.
혀가 아예 잘려버리면 죽을 수도 있다.
혀가 아예 잘려버리진 않고 조금만 잘려도 아프다.
혀가 붙기 전까지는 음식을 잘 먹지 못할 것이다.
대략 두어달은 걸리지 않을까?
세간 사람들은 오욕락에 집착한다.
육근으로 바라보는 육경을 실체시하고, 그 실체시한것을 탐착한다.
오늘 느낀 바는 세간 사람들이 탐착하는 오욕락.
그중에서도 특히 음욕이란 놈은
실체시를 하는 중생의 안목으로 봤을 때
즐거움을 주는 달콤한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걸 실체시하고 탐착하고 취하려했을 때
그 경계를 실체시하고 집착하고 탐닉할 때
온갖 괴로움이 발생된다.
이것이 원융이다.
원융은 엄밀하게는 공가중이 함께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오는 것도 원융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공간적 연기를 말한다.
중생들에게 음욕을 일으키는 대상이란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성이고 여성은 남자가 그 대상경계가 된다.
실체시를 할 떄는 그저 달콤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달콤하게 봐서 눈으로라도 취하고 의식으로라도 취하여,
그 즐거움을 계속해서 누리고자하고, 그 즐거움을 더 크게 누리고자 한다면.
일시적으로 그렇게 즐거움을 누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끝나면 이 연기법에 의하여 괴로움이 발생된다.
이를 과보라고 할 것이리라.
이 같은 현상을 순간적으로 느끼고,
나는 관신부정을 했다.
부정관을 했다.
순간적으로 달콤하게 보이는 그 음욕의 대상을 부정관을 했다.
부정관을 하는 것은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중생은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해서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그 현상을 탐낸다. 탐착하려한다. 탐내서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 한다. 취착하려 하고 탐착하려 하고 집착하려 하는 것이다.
그럴때 원융이 발생한다. 그럴 때 즐거움이 발생하며, 그렇게 좋은 것이 발생할 떄 동시에 나쁜 것도 함께 발생되는 것이다.
이것이 원융이오 연기법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실체적인 이분법적 관념이 발생했을 때, 달콤한 것을 취해서 즐거움이 발생하면 그 과보로서 매운 것이 찾아와서 괴로움이 발생된다. 이를 과보라고 한다.
수행자는 이 같은 원융과 연기의 이치를 알고
달콤함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실상을 똑바로 바라봐서 애초에 달콤한 것이란 없음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음욕을 일으키는 대상에게 관신부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육신의 실상을 바르게 관하는 것이다. 꽤뚫어보는 것이다.
온갖 장기들을 하나 하나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육신은 늙고 병들어서 추하게되고 결국 죽은 뒤에는 시체로서
부풀다가 흩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해서 뼈만남으면 그 뼈는 가루가 되고 결국 본래의 자신의 육신이라 할 실체는 단 하나도 거기에 남지 않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해서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
그렇게 관신부정을 하면 실체가 없음을 공함을 관찰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관찰 못하더라도
적어도 육신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즐거움을 취하려는 생각이 없어질 때
실제로 몸과 말로 즐거움을 탐하는 업을 짓지 않게되고
그 같은 업을 짓지 않으니 그 업에 따른 과보인 괴로운 상황도 발생되지 않게 된다.
(오계를 지킬때와 어기는 행위를 할 때의 과보가 각각 존재한다. 십선업과 십악업의 과보가 각각 존재한다. 검색해보시길 바란다.)
나는 이렇게 부정관(관신부정)을 해서 혐오감이 일어났다.
그렇게 음욕에 끄달리지 않게 되었다.
이 음욕은 이렇게 부정관을 많이 하다가,
이후에는 음욕이 일 때 이 음욕 역시 느낌이니까
이 음욕을 느낌으로서 판단없이 바라보는 수념처 수행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가 불교를 배우고 공부하며 개인적으로 이해한 바를 생활속에서 실천해 본 내용을 글로 풀어봤습니다.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늘 타인이 아니라
자신과 법에 의지하시길.
자귀의 법귀의 하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해서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서
걸림없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무 불법승.
나무 불법승.
나무 불법승.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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