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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행적 관점” - 스님의하루
2025.4.17. 백일법문 60일째, 도문 큰스님 생신, 경전 강의·불교사회대학 1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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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사구게의 의미와 더불어 금강경 제1분부터 32분까지 전체 내용을 통틀어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정리해 주었습니다.
“금강경 제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는 사구게가 등장합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일체유위법에서 ‘유위(有爲)’라는 것은 ‘의도함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상에 집착해서 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몽환포영에서 ‘몽(夢)’은 꿈을, ‘환(幻)’은 환상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환상을 꼭두각시로 번역했어요. 꼭두각시는 무대 뒤에서 누군가가 조정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존재는 없고, 그저 무대 뒤에서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형상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환상을 꼭두각시로 번역한 것입니다. 꿈이나 환상은 모두 실체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포(泡)’는 물거품이란 뜻이고, ‘영(影)’은 그림자란 뜻입니다.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말은 눈으로 보면 형상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하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실체가 없다
‘여로역여전’에서 ‘로(露)’는 이슬 로자예요. 즉, ‘여로’란 '이슬 같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역여(亦如)’는 ‘또한 같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전(電)’은 번갯불을 말합니다. 풀이하면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 같다.’는 뜻입니다. 앞의 ‘여몽환포영’과는 다르게 ‘여로역여전’은 실체가 없다는 개념보다는 그것이 금세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이슬은 존재하지만 금방 사라지죠. 번갯불도 잠시 번쩍한 뒤에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잠시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곧 그 실체가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몽환포영의 비유는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이고, 여로역여전의 비유는 ‘무상(無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緣起)입니다. 연기를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 바로 무아와 무상입니다. 실상(實相)은 연기이며, 무아와 무상입니다. 대승 불교에서 다루는 ‘제법이 공하다.’라는 표현은 부처님이 본래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만 연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대승 불교에서 ‘제법이 공(空)하다.’ 하는 것을 증명하려면, 제법이 무아이고,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연기입니다. 연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상과 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은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법이 무아와 무상임을 알아야 하고, 제법이 곧 공임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집착을 놓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항상 어떤 ‘상’을 짓습니다. 이때 ‘상을 짓는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상을 짓는다.'는 것은, 작다고 하면 ‘작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나쁘다고 하면 ‘저 사람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고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질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자체가 바로 상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상’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일단 상을 지으면, 그다음 ‘집착하는 성질’이 따라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예쁜 구름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구름 속이 텅 비어 있어요. 그러면 이 구름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가져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환상이나 물거품, 그림자와 같은 거예요. 실체가 없고 텅 비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실체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금세 변해 버린다면, 그것을 가질 수가 없겠죠.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지속되고 실체가 있다고 여겨지면, 사람은 그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시다. 어느 날 스승이, ‘수행자는 황금을 돌처럼 여겨야 한다. 수행자가 금을 탐해서는 안 된다. 그 금을 갖다 버려라.’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는 산에 가서 땅을 파고 그 금을 묻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이제 나는 이 금에 대한 집착을 놓을 거야. 잊어버릴 거야.’ 하고 다짐했죠. 자, 그럼 10년 뒤 내 머릿속에는 그 금이 떠오를까요, 안 떠오를까요?”
“떠올라요.”
“반대로 돌멩이를 하나 가져가서 같은 자리에 묻으면서 ‘나는 이 돌을 반드시 기억할 거야. 10년 안에 다시 와서 찾을 거야.’ 이렇게 마음먹고, 계속해서 ‘어느 산 어디쯤에 돌을 묻었다.’ 하고 반복해서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10년 뒤에 기억이 날까요? 당연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이 안 날 거예요.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어떤 경우는 기억하려 했는데 잊히고, 어떤 경우는 잊으려 했는데 오히려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저것은 좋은 것이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입니다. 즉, 상(相)을 세웠기 때문에 거기에서 집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금칠한 돌멩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요? 그 순간 집착이 저절로 끊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그게 ‘금칠한 돌멩이’라는 걸 모르고 ‘진짜 금’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내려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금이 아니고 ‘이거 가짜네’ 하고 알게 되면, 집착을 놓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놓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이 공하다.’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집착은 저절로 놓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사실 집착만 놓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내가 어떤 것을 갖고 싶다고 느끼는 건 괜찮아요. 가지면 좋고, 못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갖고 싶다.’ 하는 마음이 ‘꼭 가져야 한다.’ 하는 생각으로 굳어지면, 그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 기분이 나빠지고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핵심은 집착이지만 그 집착이 왜 생기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항상성이 있다.’, ‘실체가 있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결국 금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상을 짓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즉, 제법은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것에는 어떤 불변하는 요소도 없고, 신성성도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개에게는 개의 종자가 있고, 물에는 물의 본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양반과 천민의 종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실제로 양반과 천민의 종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실체가 없다.’는 철학적 사유를 넘어서, 계급 사회를 부정한 인류사적 대전환이었어요. 예를 들어, ‘여자는 부정하고 남자는 성스럽다.’라고 했을 때 성스럽거나 부정함이 없다고 하면 성차별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 차별도 없어지게 되고요.
옛날 사람들은 복을 구하는 성향이 무척 강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정말 강했어요. 그 때문에 복을 받는 것보다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법이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과 같음을 아는 것은 어떤 복보다도 크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금강경에서 이런저런 중복되는 말을 다 걷어내고 알맹이만 추리면 사구게가 남습니다.
제1구게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제2구게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基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제3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제4구게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사구게의 핵심 내용은 ‘상을 짓지 말라. 상을 짓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반복에 반복을 거쳐 결국 제법이 공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법이 공한 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무엇에든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면 될 뿐인 거예요. 예를 들어, 누군가 ‘저 산은 동산이네.’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 ‘아니야. 그건 네가 만든 상이야!’라고 지적하지 않고 ‘저 사람은 산의 서쪽 동네에서 왔구나.’라고 할 뿐입니다. 서쪽에서 온 사람은 저 산을 동산이라고 부르고, 동쪽에서 온 사람은 저 산을 서산이라고 부르는 것임을 다만 알 뿐입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아는 것이 혜안(慧眼)이라면, 중생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어떤 배경을 가져서 저와 같은 말을 하는지 아는 것이 법안(法眼)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을 탄핵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은 ‘극우 유튜브를 많이 보는가 보다.’, ‘국민의힘 지지자인가 보구나.’, ‘경상도 사람일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상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이야기를 더 나눠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어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는 말이 있는 거예요. 보살은 다만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뿐입니다.”
이로써 열두 번에 걸쳐 진행된 금강경 강의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 위 스님의 하루 내용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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