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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현상 - 깨달은 자의 견해과 중생의 견해의 현실적 조화(調和)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1. 19. 05:28

제목 :  존재와 현상 (부제 : 깨달은 자의 견해과 중생의 견해의 현실적 조화)


존재(存在)는 있다는 한자 두개가 만난 단어다.
현상(現象)은 모양이 나타나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현상과 존재는 이렇게 다른말이다.

금강경에선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 한다.

이 말은 일체유위법이 인연생기한다는 말이다.
인연생기(연기)하기에 현상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참으로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고정불변하며 독립적(개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실체를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라 한다.)

그런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인연생기하기 때문에 조건들에 의존해 발생하는 육근으로 감지되는 현상은 있다.

그러나 그 현상에 존재(실체)는 없으며,
모든 현상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모두의 인연생기하는데 있어서 조건이 되며 모두는 하나가 인연생기하는데 있어서 조건이 된다. 즉 일즉다다즉일이다. 그래서 세계의 실상은 법계무진중중연기이며, 인드라망이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본래 구분되어 있지도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그런데 중생들은 분별해서 보고 구분지어본다. 이것이 전도몽상이며, 희론이고, 실체적인 관점 즉 실체시이다.)

그래서 일체유위법은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거기에 존재한다고 할만한 실체는 없음으로

일체유위법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

여기서 꿈부터 그림자까지는 무아, 무자성, 공을 말한 것이고

이슬과 번개는 물론 유위법이기에 무아 공 무자성의 성질도 있지만, 잠깐사이에 찰나지간에 사라져버리는 현상들이기에 무상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무상 무아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인연법,   연기법을 설명한 것일 뿐이다. 연기 무상 무아 무자성 공 중도는 모두 연기라는 같은 이치에서 비롯된 연기법을 설명해주는 표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반야 중관의 공부를 하는 이는

색즉시공만 알 것이 아니라

공즉시색도 알아야 할 것이다.

공이 아무것도 없는것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 이름하는 '현상'으로 나타남을 말이다.

그리고 금강경 반야심경은 부처님과 같이 깨달은 자의 이야기다.

그럼으로 수행적으로 독송하고, 반야경들에 나오는 부처님가르침을 새겨보는건 좋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면 일상적으로는 분별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으니.

결국 불자의 목표이자 불교를 배우는 이유이자 목표는 자리이타가 아니겠는가?

모든것이 서로 연결되있기에 그 실상은 불이(둘이 아님)이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의 견해로는 불일(하나가 아님)이 현실이다. 현상은 깨달은 자의 시선으로 전체적으로 봤을땐 중중무진법계연기지만, 중생의 육안으로는 현상들이 낱낱이 다 차별이 있게 보인다.

서울대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인서울이 좋다고 생각하며 지방대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대기업이 좋다고 생각하고 중소기업은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말하지만 불교공부의 목적은 자리이타이다. 그리고 자리이타는 곧 자각각타이다.

그럼으로 깨닫지 못한 우리로서는 스스로도 다른 중생들도 깨닫게끔 하기위해. 그리고 배고프고 병들고 전쟁과 기아 폭력 재난 기후위기등에서 벗어나게끔 하기 위해.

수행도 하지만, 출가할게 아니라면

자신도 가족들도 그리고 전 인류와 지구상 모든 생명들 그리고 자연환경을 위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것이다.

돈이 있어야 재가자로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법문도 듣고 수행도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더불어 돈이 있어야 부모님 건강검진도 받게 해드리고 용돈도 드리는 등 효도도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지구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보시(기부)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건강이 유지되고 여유가 있어야 나가서 쓰레기를 줍는 등의 봉사활동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또한 환경을 위해 자가용을 몰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대중교통비가 들기도 하지 않겠는가.

고로 자리이타 자각각타의 보살도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걸으며,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한다면

수행적으론 금강경 반야심경을 읽고 새기며,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적절히 수행적으로 반야바라밀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활용하되,

현실적으로는 적절히 분별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해서 돈도 많이 벌고 인류와 지구촌에 자리이타적인 기여도 하며 보람되게 살아야 할 것이리라.

단 불자라면 현실적으로 하는 분별도 보다 창조적이고 자리이타적으로 할 수 있다.

그 방법을 필자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통해 배웠고 지금도 배워나가고 있다.

필자가 법륜스님께 배운 그 방법이란 일어난 일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기. 사실 이는 자기개발서에도 수없이 나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은 연기법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이 근거가 되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이는 더 깊이있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인지라 긍정적 관점의 적용범위도 보다 깊어지고 넓어지게(즉 커지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인연생기 因緣生起)

- 부처님 -



일체유위법은 연기하기에 연기하는 현상에는 고정된 의미또한 없다.

그러니 이미 일어난 일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지나간 일에선 교훈을 얻자.

교훈을 얻었다면 비록 당시엔 괴로웠을 지라도,

그 괴로움이 조건이 되어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니 잘된 일 아니겠는가.

이것이 필자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배운 삶의 지혜이다.

(+내용을 조금 덧붙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리이타 자각각타를 위하여 현실적으로는 돈도 벌고 가족들을 비롯한 다른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적절히 창조적으로 분별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또한 전법 포교를 위해서도 적절히 창조적으로 분별을 하는것이 필요할 것이다.

자리이타를 위해서 우리는 이와 같이 현실에서 분별을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이타를 위해서 수행적인 관점으로서 금강경 반야심경 능엄경 화엄경 등의 경전을 독송하고 공부하고 새기고 그 가르침대로 자신의 심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수행도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수행적 관점으로서 우리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며, 불이이고 중중무진법계연기이며 인드라망이고 일즉다 다즉일이며 하나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하나를 위하는 연기하는 실상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상에 대하여 불자로서 공부하고 사색할 때,

다시금 우리는 불자로서 현실에서 하화중생, 이타행, 각타행의 실천행을 해나갈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법계 모든 현상이 서로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함을 알기에 ) 이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새겨볼 때 우리는 이타행을 해나갈 근거가 충족되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등의 육바라밀이자 팔정도이자, 계정혜 삼학이자, 정정진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아직은 경전의 가르침을 체득하진 못하였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정도일 지라도 말이다.)

더불어 부처님 가르침 중에는 일체중생이 과거생 나의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형제 자매였고 친척이었다는 내용도 있으며, 작은 개미 한마리일지라도 나의 고통과 괴로움으로 미루어 짐작하여 그 개미또한 고통을 싫어하고 죽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을 알게해주는 가르침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들 역시 우리가 자리이타의 길을 나아감에 있어 힘이 되는 가르침이기에 함께 덧붙여 보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