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끊는 것이 열반이 아니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다. 지혜가 걸림이 없음도 열반이요, 여래에게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으로 항상 열반이다. - 열반경 -
- 위 경구에 대하여 염불 및 금강경 독송 기도 중 든 통찰 : 왜인지 알았다. 번뇌가 있으면 그걸 끊어내야한다. 그런데 끊어낼 번뇌가 없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다. 왜냐면 본래 일어날 번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열반의 자리에 들어 있는데 무명 번뇌로 인하여 이미 원만구족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가 걸림이 없음인 이유는 장애가 되는 것이 애초에 본래 없기 때문이다. 여래에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본래 번뇌라고 할 만한 것(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실체)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이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 부처님 -
- 위 경구에 대하여 염불 및 금강경 독송 기도가 끝난 뒤 든 통찰 : 본래 고통이랄 것이 없다. 본래 고통이라 할 실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헌데 일어나는 현상에 고통이고 괴로움이고 불행이고 두려움이고 불안이고 증오이고 시기심이고 인색함이란 이름을 붙여서는 현상의 일부분을 실체시를 하고 집착을 하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사실 본래 고통이라 할 것이 없다. 이름을 붙이며 실체시(집착) 하지 않으면 고통이라거나 희노애락이라 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현상만이 있을 뿐이며, 그 현상의 본질은 공하다. 이름 붙일 만한 실체가 없다. 그 현상은 하나인데 보이는 건 각각 나뉘어져있는 꿈처럼 보이고 환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꿈과 환상은 사실 모두 바다와 같은 하나의 마음 속에 각각의 꿈속의 등장인물들이나 환상이란 파도들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럼으로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 무실무허한 현상의 본질을 관하면 고통이고 괴로움이라 할 것이 없다. 다만 그 현상을 중생이 연기시가 아닌 실체시를 해서 바라보면서 그 부분적인 현상이 독자적이고 고정불변하게 존재한다고 착각을 하면서 그 착각으로 인식한 현상의 부분에 고통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선, 고통이 실재로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하지만 본래 고통이라 할 만한 것(실체)은 없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두 통찰의 요약 : 본래 번뇌라 할 것이 없다. 본래 장애라 할 것이 없다. 본래 고통이라 할 것이 없다.
불교경전 불경 독경이란 어플이 있는데 그 어플이 떄때로 불경구절을 알림으로 보내줍니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본 두개의 경전구절인데, 처음 구절은 봐도 잘 이해가 안되었는데 기도 중 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두번째 경전구절은 기도 끝나고 본 경전구절인데 마찬가지로 이렇게 해설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생각을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불법승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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