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4 8

시명(是名), 가명이 지칭하는 실상은

자성이오 법성인 불성이며 본래면목이다.즉, 쉽게 말해서어머니에게 "어머니~" 라고 부를 때 어머니의 생김새나 외형을 칭하는 것이 아닌,어머니의 본래면목 주인공 진여불성 진아 참나를 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부를 때 (사견에서 기인한) 그 누군가의 독릭적이고 고정불변한 개체적이며 실체적인 허상을 부르는 것이 아니며, 그 누군가의 진여불성 본래면목 참나 주인공 즉 자성불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예전에 필자가 한 스승님께 배운 귀한 가르침이다. 예전에 이 가르침을 받을 때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실상 그 상대의 자성불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임을 배웠는데,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니 이 가르침이 삼법인 중관 유식 등의 가르침과 합치되면서 이 글에 쓴 바와 같이 조금 더 이 가르침에 ..

명상수행에 있어서 버린다는 것의 뜻

명상 좌선 참선 염불등 명상을 할때생각을 버린다는 것은그 생각이 지칭하는 대상의 실체가 없고그 생각 또한 연기한 것인지라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음을 알고. 즉 제법무아를 알고.)실체가 없기에 이름을 붙일 곳도, 붙잡을(집착할) 곳도, 머무를 곳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그렇게 명상을 할 때 일어나는 생각이 가리키는 대상도 공하고, 그 생각도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며, 현상에는 자아라 할 만한 실체도 없음을 알면떠오르는 생각에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 있다. 즉 그 생각을 붙잡으려 하지 않게된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그게 버리는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했다. 가만 놔두는 것인 것이다. 호흡을 관찰하거나 좌선을 하거나 사념처 등의 명상을 할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이다.

어딜가나 피할 수 없는 이유

연기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일체개고가 성립된다.1. 모든 것은 서로서로 연결된 것이 연기이다. 해서 세상일은 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대로 즉 인연의 조합대로 펼쳐진다. 그래서 세상 일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고, 사고팔고가 발생되는 것이다.2. 사실 더 엄밀하게 바라보자면 제법무아인지라 연기하는 현상엔 자아라 할 실체도 없다. 결국 연기하는 현상은 나의 일이 아닌 인연의 일이고 인연(연기법)의 영역인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연기하는 현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기하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 즉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맡보고 감촉되는걸 느끼고 의식의 경계를 인식하는 6,7,8,9식이 있다.이때 8식인 아뢰야식까지는 연기한 것이다. 그러나 진여 불성 본래면목 진아 참나 주인공인 본성은 상..

어딜가나 피할 수 없다

이를 느꼈다.법회를 가면 요즘 스님이 항상 해주시는 법문이불교는 마음법이고 인연법이라는 것이다.결국 내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피하고자해도 마음이 괴로운 상황은 모습만 바꿔서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어제 느꼈다.심리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은 미해결된 과제(상처)는 계속해서 현실에서 그 미해결된 상처가 투영되서 보인다.결국 이 이치로 인해내 마음이 바뀌지 못해서같은 상황에서도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고 그 상황이 걸림이 되는 이상 같은 상황은 계속해서 마주칠 수 밖에 없음을 직접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경험하기도 했거니와, 어제와같이 피해도 피할 수 없고 다른 형태로 같은 걸림이 발생되게 됨을 경험했다. 결국 내가 해탈해야된다.생각이 없어야된다. 집착을 놔야된다. 머무르지 않아야된다. 현상은..

볼 때는 봄만 있고, 들을 땐 들음만 있다.. 견견문문

https://m.cafe.daum.net/santam/IaMf/473?listURI=%2Fsantam%2FIaMf 볼 때는 봄만 있고, 들을 땐 들음만 있다.. 견견문문[우다나 - 깨달음의 품'바히야의 경']나는 이렇게 들었다.한 때 부처님께서 사바타 근처의 제타숲에 있는 아나싸삥디까 사원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그 때 나무껍질 입은 바히야가 수빠라카에 있m.caf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