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생기법에 부합되지 않는 욕심(바램)과 집착을 버리면 괴로움이 없다.
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욕심과 집착이 생기면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욕심과 집착이 없으면 괴로움이 없고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된다.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과법과 연기법(인연생기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현상이 발생되려면 그 현상이 발생될 인연이 화합해야 한다.
즉 적절한 인과 연이 갖춰지고 형성되어야 특정한 경계, 현상, 과보, 상황이 발생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내가 라면을 끓이는 것은 할 수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노병사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할 수가 없다.
또한 계절을 바꾸는 것 역시 할 수가 없다.
겨울이 왔는데 하루 아침에 여름이 되게 변화시키는 것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이 세상과 삶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이와 같은 삶과 세상에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내 삶을 돌아보니
인과법, 인연생기법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욕심을 가지고 집착을 할 때 그런 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
시험을 100점을 맞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일이다.
그러나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100점을 맞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다 찍어서 100점을 맞아야 하는 것인데 이는 확률적으로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논문을 통과하는 것 역시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시험을 100점을 맞고, 논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결과를 발생시킬 인연이 형성되고 갖춰져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 같은 인연생기법과 인과법을 알면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자리이타적인 목표(원)를 세우고,
노력했는데
달성하지 못했다면
생각 없이 그저 다시 또 시도하고
또 시도하게 되는 것 같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조해보길 바란다.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6858
뭐든지 해내는 법
하고또 하고 또 하면 된다. 하고 안되었다면또 하고 그래도 안되었다면또 하면 된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하면 된다.여기에 생각이 개입되면 힘들다. 모든 결과는 인연생기법에 의하여 발생된
findthebrightroad.tistory.com
그런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날씨도 생노병사도 바꿀 수 없지만,
또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타인이다.
사람의 변화는 그 사람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서 발생된다.
내 경우가 그렇다.
그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폭력과 협박을 한다면 감옥에 가야 하고 전과가 남는다.
전과가 남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지장이 생긴다. 더불어 폭력과 협박은 십악업에 해당되는 행위다.
악업인 것이다. 악업을 지으면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된다. 선인락과 악인고과이다. 그리고 일체중생은 과거생에 나의 어머니였다. 윤회해온 세월은 지구상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인간과 축생의 수를 합한것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우리는 무한한 세월을 윤회해온 여행자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있어서 일체중생 중 과거생에 어머니 아니었던 중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중생은 모두가 과거생에 나의 어머니였다는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대승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초기경전인 니까야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한 경전에만 등장하는 가르침도 아니고 여러 경전에서 등장하는 가르침이란 것이다.) 더더구나 연기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타인과 자신은 둘이 아니다. 이를 불이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법성게의 일즉다 다즉일을 살펴보자면 이 일즉다 다즉일의 일즉다의 뜻은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나와 타인은 각각 별개의 존재라고 중생은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마음 속에 일체중생 삼라만상이 들어있고, 삼라만상 일체중생 가운데 또 내가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연기법은 다양한 방면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같은 연기법을 살펴보면 결국 모든 것은 하나임을. 모든 현상은 사실 하나의 현상이고 하나의 허공의 꽃임을 알게된다. 그럼으로 폭력과 협박은 애초에 고려해서는 안될 일이다. 자신이나 타인을 지키며 살리고자 하는 목적성을 가짐과 동시에 악행을 저지르려는 상대까지도 고려한 지혜와 자비가 조화를 이룬 자리이타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으로 결국 다른 사람이 자각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것 이외에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할 진데
다른사람을 신경 쓸 이유가 있을까?
없다.
내가 바꿀 수 없는걸 신경쓰고 생각해봤자 시간낭비 아니겠는가.
더더구나 신경쓰고 생각해서 내가 불안해지거나 두려워지거나 화가나는 등의 번뇌가 일어난다면 이는 어리석은 짓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필자는 알게되었다.
물론 나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만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남을 신경쓸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 안에서라면
남을 신경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 안에서는 어떻게 살면 좋을까.
앞서 말한 대로이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집착과 욕심이 가미되지 않은 자리이타적인 목표.
즉 원을 세우고서는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욕심없이
내가 할 수 있는걸 하면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남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폭력이란 수단을 제외하면. 하지만 이 수단은 앞서 말한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고려해서는 안될 것이다. 폭력을 개인의 이기심이나 탐욕이나 분노를 위해서 사용해서는 결코 안될것이며, 이를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지혜와 자비를 동반한 안목과 마음을 가지고서, 자리이타적인 목적으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꿀 수 없는 걸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 시간과 에너지를 헛되히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 안이라면
만약 자리이타적인 원이 있다면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욕심과 집착이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나가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다.
헌데 바꿀 수 없는 걸 욕망하고 또 집착하는 것은 인연생기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같은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서 현실과 욕망의 괴리가 발생되며 괴로움이 발생되며 괴로움이 발생됨으로
다시금 말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결론은 바꿀 수 없는 것을 욕망하지 말며,
모든 집착을 버리고
단지 지혜와 자비심으로서
자리이타적인 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남들에게 피해 가지 않는 선 내에서
시도하고, 안되면 다시 시도하고 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리고 바꿀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은 남들 역시 포함됨으로
남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자는 것이다. 기대가 곧 욕망 아니겠는가.
해서 남들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 기대. 욕망을 버리고.
남들 신경쓰지 말고. 남들 관여하지 말고 내버려두고
단지 자리이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연생기법으로, 인과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삶에는, 세상에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욕심과 집착으로 인해 생긴다.
그런데 욕심과 집착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부리는 번뇌이다.
더 정확히는 인연생기법에 따라서 발생되고 변화하는 현상을 실체적으로 바라보며 내 뜻에 맞게끔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램이다.
하지만 이 바램은 실현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이 바램이 인연생기하는 현상의 변화방향과 같은 방향성을 가질 수도 있고 다른 방향성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뜻과 연기하는 흐름의 방향성이 같지 않을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
그러니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일단 생노병사하는 흐름을 바꾸겠다거나 계절을 바꾸겠다거나 하는
불가능한 바램을 가진다면 이 바램은 결코 실현되지 않기때문에 괴로움이 생길 것이니
이 같은 바램을 갖지 않고.
더불어 남 역시 남 자신의 자각이 아니라면 변화하지 않으니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어보이는 남이라면
집착을 버리고 더불어 바꾸고자 하는 욕심(바램)을 버리고서는
(이 같은 바램 가져봤자 계절을 바꾸고자 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어긋나서 괴로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니까.)
자리이타적인 목표인 원을 세우고서
욕심 없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며 서원을 성취하고자 집착과 욕심 없이 노력하는 자리이타적인 목적성을 가진 삶.
집착 없이 중도적으로 노력하는 삶.
'인연생기법에 부합되지 않는 욕심과 집착' 을 갖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면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편안하지 않겠는가.
이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글로 정리해보았다.
'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공부는 처음엔 욕심으로 하는 것이다. 계속해 나가다 보면 욕심도 집착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욕심과 집착이 없을 수는 없다.) (0) | 2025.03.11 |
---|---|
뭐든지 해내는 법 (0) | 2025.03.10 |
남의 행위와 나의 행위 중 중요한 것은? (0) | 2025.03.10 |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해야 하는 이유는?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아야 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일체의 악을 품지 말고 마음속에 일체의 선을 갖고 마음을 공적하고 청정하게 일체의 집착과 무명망념 없이 맑혀야 하는 이유는?) (0) | 2025.03.09 |
글 잘쓰는 법 (0) | 2025.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