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178

[생각의 본질] 생각 속엔 참다운 답이 없다.

생각은 실체시이다. 생각은 실체적인 나도 대상도 있다고 여기는 실체시이고, 그래서 이 실체를 있지도 않은 허망한 자아관념에서 비롯된 욕심으로 바꾸려하고 붙잡으려하는것이다. 생각은 실체적인 것이란 관념에 머무는 사견이다. 생각은 언어와 고정된 형상으로 이뤄져있다. 이 두가지는 항상성이란 속성을 가진다. 생각은 그래서 희론이다. 그래서 생각은 번뇌이다. 그래서 생각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게 아닌 뒤바꾸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은 착각이고 망상이다. 즉 생각에 빠진건 꿈 헛깨비 신기루 환영 물거품 그림자를 실재하는 존재라고 착각해서 거기에 놀아나는 것이다. 고로 생각으로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생각 속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근본적으로는 무명에서 연기..

시명(是名), 가명이 지칭하는 실상은

자성이오 법성인 불성이며 본래면목이다.즉, 쉽게 말해서어머니에게 "어머니~" 라고 부를 때 어머니의 생김새나 외형을 칭하는 것이 아닌,어머니의 본래면목 주인공 진여불성 진아 참나를 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부를 때 (사견에서 기인한) 그 누군가의 독릭적이고 고정불변한 개체적이며 실체적인 허상을 부르는 것이 아니며, 그 누군가의 진여불성 본래면목 참나 주인공 즉 자성불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예전에 필자가 한 스승님께 배운 귀한 가르침이다. 예전에 이 가르침을 받을 때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실상 그 상대의 자성불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임을 배웠는데,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니 이 가르침이 삼법인 중관 유식 등의 가르침과 합치되면서 이 글에 쓴 바와 같이 조금 더 이 가르침에 ..

명상수행에 있어서 버린다는 것의 뜻

명상 좌선 참선 염불등 명상을 할때생각을 버린다는 것은그 생각이 지칭하는 대상의 실체가 없고그 생각 또한 연기한 것인지라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음을 알고. 즉 제법무아를 알고.)실체가 없기에 이름을 붙일 곳도, 붙잡을(집착할) 곳도, 머무를 곳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그렇게 명상을 할 때 일어나는 생각이 가리키는 대상도 공하고, 그 생각도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며, 현상에는 자아라 할 만한 실체도 없음을 알면떠오르는 생각에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 있다. 즉 그 생각을 붙잡으려 하지 않게된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그게 버리는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했다. 가만 놔두는 것인 것이다. 호흡을 관찰하거나 좌선을 하거나 사념처 등의 명상을 할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이다.

어딜가나 피할 수 없는 이유

연기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일체개고가 성립된다.1. 모든 것은 서로서로 연결된 것이 연기이다. 해서 세상일은 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대로 즉 인연의 조합대로 펼쳐진다. 그래서 세상 일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고, 사고팔고가 발생되는 것이다.2. 사실 더 엄밀하게 바라보자면 제법무아인지라 연기하는 현상엔 자아라 할 실체도 없다. 결국 연기하는 현상은 나의 일이 아닌 인연의 일이고 인연(연기법)의 영역인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연기하는 현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기하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 즉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맡보고 감촉되는걸 느끼고 의식의 경계를 인식하는 6,7,8,9식이 있다.이때 8식인 아뢰야식까지는 연기한 것이다. 그러나 진여 불성 본래면목 진아 참나 주인공인 본성은 상..

어딜가나 피할 수 없다

이를 느꼈다.법회를 가면 요즘 스님이 항상 해주시는 법문이불교는 마음법이고 인연법이라는 것이다.결국 내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피하고자해도 마음이 괴로운 상황은 모습만 바꿔서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어제 느꼈다.심리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은 미해결된 과제(상처)는 계속해서 현실에서 그 미해결된 상처가 투영되서 보인다.결국 이 이치로 인해내 마음이 바뀌지 못해서같은 상황에서도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고 그 상황이 걸림이 되는 이상 같은 상황은 계속해서 마주칠 수 밖에 없음을 직접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경험하기도 했거니와, 어제와같이 피해도 피할 수 없고 다른 형태로 같은 걸림이 발생되게 됨을 경험했다. 결국 내가 해탈해야된다.생각이 없어야된다. 집착을 놔야된다. 머무르지 않아야된다. 현상은..

집착(執捉)

잡을 집잡을 착집착이란 붙잡는 것.제법이 연기한 것인지라제법에는 실체가 없기에 붙잡거나 구할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알고붙잡지 말자.제법에 대해서 실체시하지 말고연기하는 것으로서 있는 그대로 보자.(연기시 하자.)해서 연기하기에 무상한 것이고연생연멸 연기하기에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으며,개념은 상호의존적으로 동시발생되는 것이기에 이 같은 공간적 연기를 볼 때도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서모든 것이 무자성 공이기에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안개 그림자 이슬 번개같음을 알아서 {이 비유하는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들은 모두 무자성이고 공한 속성을 보이는 현상들이다. 앞의 다섯가지는 실체가 없음을 나타내는 비유이며, 뒤의 두가지는 무상함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실체는 없고 연기가 있는..

시간적 연기와 공간적 연기 (나라 할만한 실체는 시간적 연기에서도 공간적 연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제목 : 시간적 연기와 공간적 연기(나라 할만한 실체는 시간적 연기에서도 공간적 연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시간적 연기 : 선후과정이 있다. 원인이 형성되니 결과가 원인에 의존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됨을 말한다. 이 시간적 연기는 제행무상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예시 : 햇빛이 잘들고 토양이 비옥한 곳에 씨앗을 심었다. 봄에 씨앗을 심고 몇칠 기다리니 싹이 나왔다. 여기서 씨앗은 인이고 햇빛 토양 양분 수분과 같은 환경적인 조건은 연이다. 이와 같은 인과 연이 화합할 때 새싹이 돋아나는 현상이 결과로서 발생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언제나 인은 자기 자신의 행위이고, 연은 시절인연이라 말하는 시공간적 조건이다. 내가 누군가를 욕을 하..

수행자의 길과 중생의 길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탐심과 진심)으로 관여하면 괴로워지는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나라 할 수 있는 실체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럼 그런 현상은 무엇인가?일체유위법 모두가 그런 현상이다.그런 현상을 연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즉 정견이다.그런 현상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사견이다.하여 정견이란그런 현상 일체 모든 것의 변화는첫째, 인연의 영역이고 인연에 달린 일이지 있지도 않은 실체적이고 관념적인 '나'의 일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연기하는 현상작용을 구분짓고 분별해서는 나 너 선 악 우월 열등 등의 이름이나 개념을 붙이지 않고 조건들 서로 서로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서 연결되 있으며, 연결되어 있음에 직간접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연결이 안된 것이 없..

잠에 대한 고찰 & 바른 정진과 칠불통계게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깨달아야 되는데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그러나 졸음이 쏟아지면 자게된다.오늘은 낮잠을 두시간 이십분가량을 잤다.부처님 법 공부하고 수행해야되는데 시간낭비가 너무 심하다.잠에 휘둘리지 않을 수는 없을까해서 고찰했고1. 어제 저녘식사 전에는 머리가 명민한 상태였다가 과식 후 둔해지는 경험으로 알게된 바 식욕을 충족하고자 과식을 한 뒤엔 머리가 둔해짐을 경험했다. 뇌가 소화에 용량이 할당되서다. 영민한 깨어있는 두뇌로 공부하려면 과식해선 안되며 적당히 먹는것이 좋고 그보다 더 머리가 잘 돌아가려면 약간 모자란듯이 먹는게 좋을듯 싶다.2. 오늘 점심에 약간 모자른듯이 식사를 한 이후엔 명민하게 깨어있는 두뇌로 학습을 잘 진행할 수 있었다. 3. 오후 4시경에 과식을 한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