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176

만다라 수행법이 내게 자유를 주었다

티베트 스님들은 만다라 수행을 하신다.엄청 오랜시간동안 만다라를 심혈을 기울여서 그리시고 나서 한번에 다 흩어버리신다.이는 집착을 버리는 수행법이다.나도 이 블로그를 만다라처럼 여겨야겠다.한순간에 확! 만다라처럼 흩어버릴 수 있도록.이 블로그를 비롯해 내가 집착(실체시)하는 대상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겠다.즉 그 실체시하는 대상들을 연기시해야겠다.즉 그 실체시하는 대상들을 물거품 꿈 그림자 환영처럼 생각해야겠다.더불어 이 몸은 물거품처럼 마음은 아지랑이처럼 생각해야겠다.해서 아인중생수자상(실체적인 관념)을 갖지 말아야겠다.다만 단멸상도 갖지 말아야겠다.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허공과 물질 현상과 정신작용 일체가 모두 관음행자에겐 관세음보살님이며미타행자에겐 아미타부처님이며교리적으론 진여연기이니모든것이 하나다.그..

수행이란

수행이란대상이 되는 경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지혜를 밝히는 것이다.그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지혜를 밝히는 길인가.집착을 버리는 것이다.무엇이 집착을 버리는 것인가.실체시한 대상들을 비실체시 하는 것이다.비실체시 하는 것은 무엇인가?연기시 하는 것이다.연기시 하는 것은 무엇인가?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에 의존하여 성주괴공하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그리고 그 현상의 특성이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임을 아는 것이다.조금 더 나아가자면그 현상에 중생들이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과 반대되는 개념이 동시 발생됨을 아는 것이다.하여 선후관계에 있어서도 개념적으로도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인 연결성으로 연결되어서모든것이 상호간에 연결되있고,서로간에 연결이 안된 현상은 없다는 것이다..

삼세를 같이 보라.

필자의 큰 스승님은 삼세를 같이보라고 하였다. 점을 찍지 말라고 하였다.지금 한 시점만이 아닌 멀리멀리 보라고 하셨다. 그 이외의도 필자가 대학에서 만났던 한 교수님은 종종 훌륭하고 필자의 가슴에 와닿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는데,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저는 여러분의 가능성을 봅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능성을 믿기에 여러분에게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인 즉슨 지금 현 시점만 보는것이 아닌 미래를 함께 본다는 것이다.사람은 이와 같이 삼세를 함께 보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리라한 점만 찍어서 그 시점만을 보는것이 중생이고삼세를 함께보고 공간적연기를 함께보는것이 연기적 시각이자 불보살님의 시각일 것이리라.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고이것이 없으면 ..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웃으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웃으랴목슴은 언제나 불타고 잇나니,그윽하고 어두움에 둘러싸여도,등불을 찾을 줄을 모르는구나.천하고 더러운 법 배우지 말라.게으름 피우며 시간을 보내지 말라.그릇된 소견을 다르지 말라.세속의 근심 거리를 만들지 말라.이 세상 모든 것 물거품 같고,사람의 마음은 아지랑이 같다.이렇게 세상을 보는 사람은,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사랑하는 것에로 달려가지도 말고,미워하는 것을 두지도 말라.사랑하는 것은 못보면 근심하고미워하는 것은 보면 근심스럽다.분별하지 말자.무자성으로 보자물거품과 아지랑이로 보자.무상한 것으로 보자. 인간의 살아있는 시간은 찰나지간임을 알자.해서 게으름 피우지 말자.이 세상 모든 것 물거품같고 마음은 아지랑이 같다고실체없다고 그리 보자.세번째 문단까지는 유튜브의 ..

연생은 생겨난 바(실체)가 없어서 불생불멸이다.

연생은 무생이다. 연생은 생겨난 바가 없다. 연생은 자성이 생겨난 바가 없다는 것이다. 고로 무생이고 그래서 불생불멸인 것이다.연생인지라 생겨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언어를 떠나있다는 말이다. 언어에 해당되는 자성(아트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나'라는 개념 등 1,2,3인칭과 관련되거나 언어나 개념이 들어간 생각은 모두 희론이다. 자성(=아트만=실체)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연생한 것은 생겨났다고 할만한 것도 없지만, 이름붙일 것도 없는것이다. 자성은 실체고 실체는 항상성을 띈다. 그리고 언어역시 항상성과 실체성을 띈다. 그럼므로 연기하는 현상에 언어로 표현할만한 자성은 없어서 진공묘유인 것이리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인 것이고 말이다.고로 생각이 곧 어리석음이고 번뇌다..

불편한 느낌과 감정은 무대 위에서 내려와서 관객석에서 관람하듯 바라보기만 하라.

제목 : 불편한 느낌과 감정은 무대 위에서 내려와서 관객석에서 관람하듯 바라보기만 하라.  https://moktaksori.kr/Writing-3/?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8477285&t=board 모든 것이 한마음 속의 일이라는 것이 자각되었지만, 감정적인 부분이 해결이 안 됩니다 : 법상[질문] 저는 마음공부를 하던 중, 어느날 이 모든 것이 한마음 속의 일이라는 것이 자각되어 확 와 닿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뒤에 다시 회광반조가 일어나 질문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moktaksori.kr  목탁소리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법상스님의 이 글을 읽고 난 뒤,  좀 있으니 알았다. 감정이 내가 아님..

일체중생과 부처님이 내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일체중생 누구나 다 바랄것이다.내가 실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현상으로 들어난 자신들의 언행을 실체적으로 보고는그 헛깨비에 시간낭비하지 않기를마음속 깊은 본성에서는 누구나가 다 마찬가지로 바랄것이다.왜냐하면 일체중생은 과거생 내 부모님이었기 때문이며보다 더 본질적인 근원에서는 나와 일체중생이 둘로 나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즉,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오직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해야만.부처님이 되는 공부를 해서 부처님이 되어야만 과거생 부모님이었던 일체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니.일체중생은내가 실체시하지 않고실체시하지 않아서 현상으로 들어나는 무실무허한, 실체가 없어서 존재성이 없는 헛깨비일뿐인 관념에 놀아나지 않고불교 공부에 매진하기를 바랄 것이다.아니 설령 불교공부가 아니라 세속 학문을 하고 ..

마음이 편안해지는 불교적 사유방식 - 불이법에 대한 사유 (마음 편안해진 조건파악 = 인연관)

제목 : 마음이 편안해지는 불교적 사유방식 - 불이법에 대한 사유 (마음 편안해진 조건파악 = 인연관)부제 : 진리적 차원에선 둘이 아니다. 아도 공하지만, 아를 구성하는 오온 육계도 연기한 것인지라 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적 차원에서는 둘이 아니며 둘일 수가 없다. 즉 진리적 차원에서는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남과 내가 말이다.) 본래면목 자성의 자리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현상도 잘 살펴보면 결국 일즉다 다즉일임으로 둘이 아니다. 현상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 조건은 상호간에 상의성이란 관계로서 one for all, all for one 즉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 위하는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이를 중중무진법계연기이자 인드라망이라고 할 것이리라. (그리고 필자는 진여연기에 대해..

내가 없다. 이합집산하는 연기만 있다.

실체가 없으니 존재성도 없고없어질 실체도 없으니 비존재성도 없다.무실무허다.중도다.결국 이합집산하는 연기만이 있으니자아에대한 집착은 버리고부처님 시봉 잘 하자.그런데 심우도 등에선 공또한 공하다고 하니결국 자성도 실체가 없는, 그러나 무명조차도 사라졌기에 연기하는 현상조차도 없는 텅 빈 것이 결국 불성이자 자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내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