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176

나는 없지만 무명과 식과 업이 있기에 숙명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없지만 무명과 식과 업이 있기에 인생은 숙명론이 아닌 것이다.나는 없고, 굳이 내가 있다고 하자면 세상 전체가 곧 나이며 또한 진여가 나이지만깨닫지 못한 무명중생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할만한 것이 있으니 실체는 없으며 현상으로서 무명에서 연기하여 발생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으로서의 식이 존재한다.이 식은 육신의 생명이 다하더라도 수상행과는 달리 멸하지 않고 변화를 지속한다.그래서 중생은 윤회를 하는 것인데 깨달으면 이 식은 식이라는 이름이 사라진다. 그럼 남는 것은 그 시점부터 해서 점차 힘을 잃어가다가 무여열반의 시점에 육신의 수명이 다할 때 육신과 함께 소멸하는, 무명에서 연기했지만 깨닫기 전에는 그저 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었고 깨달은 후에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때문..

거짓 세계

실상을 알면감각기관인 육근으로 인식되는 모든 존재와 사물들은 실체가 없이 그저 일시적으로 나타난 환영임을 알게된다.문제는 그 환영들이 너무나 리얼하다는 것이다. 2014년이었던가 허공에 영상을 띄우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이 기술은 시각적으론 현실과 같을 수 있고 또 청각적인 자극도 비슷하게 줄 수 있겠지만 향미촉법까진 구현하지 못한 기술이다.그래서 이 허공 영상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이 환영일 뿐임을 알 수 있지만현실세계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그러나 금강경을 공부해보면 이 현실세계 역시 실재로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실재로 존재한다면 실재로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어야된다. 언어로 만들어진 단어는 고정불변한 속성 즉 항상성을 가지는데, 이 단어 이름..

요즘 들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감을 많이 느낀다.

조금 쉬면 어느새인가 한 시간식 훌적훌적 지나가있다.수면에 관하여 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수면을 조절한다는 것은 잠이란 무명과 현혹과 전복(顚覆)을 부르니 이를 방종히 해서는 안 된다. 잠이 지나치면 성인의 법을 닦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공부를 상실하여 마음이 어두워져서 선근(善根)이 사라지게 된다. 마땅히 무상함을 깨닫고 수면을 조절하여 정신과 기운을 맑게 하고 생각과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야 성인의 경지에 마음을 두어 삼매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초저녁이나 늦은 저녁에도 또한 수행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하니, 수면의 인연으로 일생을 헛되게 보내어 얻은 바 없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덧없는 불이 모든 세간사를 태워버린다는 점을 생..

[학습] 공부에 흥미와 재미 붙이는 법

공부는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된다. 즉 쉬운 것부터 해야한다.어려운 것이나 이해 안되는 것부터 하려고 하면 재미가 없다.이해가 되야 재미도 있으며,그리고 그렇게 이해되는 공부를 해서 성적을 잘 받는 경험을 하거나 공부를 해서 지식 지혜를 쌓고 그렇게 쌓은 지식 지혜가 삶에서 도움이 되고 삶을 윤택하고 원만하게 해주는 경험을 해볼 때 공부에 흥미도 생기고 재미도 생기는 것이다.(그리고 그렇게 발전이나 성취를 경험해볼 때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인 자기효능감도 커진다.)배우고 익힘(학습)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오늘 제법무아에 대하여 통찰한 내용

제법무아의 아. 나. 나란 언어표현이다.결국 제법무아란 언어에 해당되는 고정불변의 속성을 가진 실체란 없다는 것이다.다시말해 제법이 연기한다는 것이다.시간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그 현상에 중생들은 이름 개념을 붙이지만개념은 하나가 아닌 구분지어 다수로 보는거고 나누는거고 독립적이고 항상성을 지닌 실체로 보는 것이다.하지만 조건에 의존해 발생한 현상은 분리된바가 없이 모두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으로 나타난다. 상호가 상호의 조건이 된다.결국 모든건 하나의 현상이다.그리고 그 현상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에,무명이 없던 명이던 시점엔 본래 없던 것이다.즉 오온과 삼독심은 본래 없는 것이다.고로 제법무아란 언어에 해당하는 속성을 지닌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으며, 고정된 형상과 같은 실체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중생..

현 대통령님과 정국(政局)으로 나툰 법신부처님을 통해 배운 것

삼독심도 연기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없는 것이고삼독심이 일어날 조건이 된 경계 역시 본래 공적함을 알아서공한 마음을 돌이켜서 반조하는 것이 수행이다.정치도 이런 관점을 가지고선, 치성한 역경계인 민주당과 언론의 형상이나, 이 조건을 접촉하여 발생한 삼독심이 모두 본래 없는 것이고 공적함을 알아서즉 다시말해서 이 같은 삼독 번뇌와 경계가 모두 연기한 것임을 알고, 자신이라 여겼던 이 육신과 정신작용 역시 연기한 것임을 알아서이 연기하는 현상에는 실체가 없음을 알아서그 현상에는 '나'라 지칭하고 이름붙일만한 연기하지 않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음도 알아서정국의 일이나 언론이나 야당에서 보이는 형상이 모두 연기하는 현상이며 그 현상은 인연의 소관이고, 그 현상은 인연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그 현상은..

나의 일이 아닌 연기의 일이라고 하는 이유는 수행적 관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연기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자아 역시 실체이다.고로 나의 일이란 없고, 연기하는 것은 모두 연기의 일이니 연기에게 맡기고 나는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개는 원래 짓기 마련이고 우리 몸은 태어났다면 노병사의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되어 있다.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흩어지거나 다하여 변화하면 연기하여 발생된 현상도 그 수명을 다하고 흩어지며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가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거나..)그러나 인을 짓는 것은 행위자인 자신이기도 하다. 고로 나의 일이 아닌 연기의 일이라 함은 명상등 수행적 관점에서 말하는 예기다. 복을 짓고 행 불행 고락의 과보역시 행위자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수행자는 선업을 짓고 십선계 오계를 행하고 보시를 행하는 것 역시 필요하겠지만, 좌선 등..

[생각의 본질] 생각 속엔 참다운 답이 없다.

생각은 실체시이다. 생각은 실체적인 나도 대상도 있다고 여기는 실체시이고, 그래서 이 실체를 있지도 않은 허망한 자아관념에서 비롯된 욕심으로 바꾸려하고 붙잡으려하는것이다. 생각은 실체적인 것이란 관념에 머무는 사견이다. 생각은 언어와 고정된 형상으로 이뤄져있다. 이 두가지는 항상성이란 속성을 가진다. 생각은 그래서 희론이다. 그래서 생각은 번뇌이다. 그래서 생각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게 아닌 뒤바꾸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은 착각이고 망상이다. 즉 생각에 빠진건 꿈 헛깨비 신기루 환영 물거품 그림자를 실재하는 존재라고 착각해서 거기에 놀아나는 것이다. 고로 생각으로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생각 속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근본적으로는 무명에서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