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정토불교대학

금일 시삼무차별을 완전히 경험하였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4. 13. 20:59

금일 시삼무차별을 완전히 경험하였다.

시삼무차별이란 중생과 마음과 부처님은 똑같다는 이치이다.

비유하자면 물과 얼음과 구름이 똑같은 것인 것과 같이 말이다.

 

필자는 그간 필자의 마음이 중생으로, 외부경계로 들어남을 경험은 어느정도 해 보았다.

하지만 마음과 중생이 부처님으로 나타남은 확실한 경험이 부족했다.

헌데 오늘 마음과 중생이 부처님으로 나타남을 경험하였다.

 

정말 신기하더라.

 

이 경험을 한 후 필자가 알게 된 사실은

 

부처님은 중생의 실체적인 관념을 떠나있다는 것이었다.

중생의 생각, 관념, 판단을 가지고는 결코 부처님을 볼 수가 없음을 오늘 경험 이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오늘 본 부처님은

 

전체였다.

 

개체적이고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는 사견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중생의 관념을 떠난 전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부처님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었다.

그 상황 전체가 곧 부처님이었다. 

 

해서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 부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그렇다. 부처님은 연기하는 흐름으로 나타나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자면, 그 흐름에는 이렇다고 이름붙일만한 실체가 없다.

해서 그 상황은. 그 부처님은. 결국 이름 할 것이 없어서 공한 것이 그 본질이었다.

 

아까 필자가 경험한 부처님을 구성하는 상황.

그 상황속 사람들 하나 하나가 모두 부처님이었다. 그 상황에서 발현된 것은 자리이타였고 자각각타였다.

결국 그 상황은 모두를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자비 그 자체였다.

 

절묘하였다.

 

사람 하나 하나가 모두 그 상황을 이루는 모자이크였다.

 

정토회 명심문 중 "우리는 모자이크 붓다입니다." 라는 문구가 이해되었다.

 

결국 부처님은 일개인을 떠난 전체였다.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석가세존 단일 인물을 부처님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니었다. 필자가 오늘 경험하고 통찰된 바에 의하면

 

석가세존과 더불어 1250인의 제자들과 승가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조건들.

승가에 보시물을 받치는 사람들, 세존께 찾아와 질문을 여쭈며 궁굼함을 호소하던 사람들.

그리고 더불어 세존이 무언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무언가에 속하는 대상들.

삼계, 육도에 속해있는 모든 중생들. 결국 그 모든 상황이 종합적으로 형성되었기에 팔만사천법문이 설해질 수 있었다.

 

결국.

 

결국 말이다. 

 

필자가 오늘 통찰하고 느끼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 일체의 조건들이 결국 진짜 부처님이었다.

 

석가세존은 방편으로서 열반에 드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이는 제자들에게 무상심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치열하게 정진하게끔 하는 방편이며 가르침이었다.

 

그럼 부처님은 사라지신것인가?

아니다. 교리를 조금만 공부해도 알 수 있다.

소멸이란 없다는 것을. 실상은 연기 중도라는 것을.

연기 중도의 이치에 의하면 생이라 할 것도 멸이라 할 것도 없어서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해서 교리적으론 부처님은 소멸한 것이 아니다. 열반에 드신것이고, 법신불이 되신 것이지.

 

헌데 오늘 필자가 한 경험. 이 경험으로 얻은 통찰, 느낀바에 따라도

 

이제 알겠다.

 

부처님은 언제나 항상 필자 곁에 계셨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부처님은 이 일체중생 모두가 성불하는 그날까지 중생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왜냐고?

 

시삼무차별이니까.

 

중생과 마음과 부처님은 똑같으니까.

물과 얼음과 구름이 똑같듯이.

중생과 마음과 부처님은 차별이 없으니까.

 

해서 정리하자면 그간 필자는 필자의 마음이 외부 경계로 나타남을 여러번 경험했었다.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분노가 마음속에 많을 때는 대개 괴로운 상황이 발생되었었다.

세상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그 세상이란 결국 중생들로 구성되어있다.

결국 중생들은 필자의 마음이었다. 이를 그간 필자는 경험했었다.

 

헌데 오늘.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토불교대학 실천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환경실천활동일이었다. 해서 쓰래기 줍깅을 하고 나서 커피숍에서 마음나누기를 하는데

여기서 각자의 마음을 나누었고, 필자는 필자가 하고 싶은 법담을 하는데

이 법담이 함께 나누기를 하는 구성원들에게 와닿게끔 절묘하게 진행자분께서 말을 잘 중간에 필요없는 부분은 정리해주시고 하셔서 그래서 절묘하게 필자도 사전에 생각치 못한 절묘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 이야기가 함께 나누기를 하는 구성원분들께 울림을 준 것 같다고 느껴졌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고. 필자가 예기 할 거리를 그 나누기를 하기 이전에 절묘하게 미리 물어주신 분이 계셨기에 나누기때 필자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예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역시 좋은 법문이 되었다. 마지막 나누기때는 오늘 실천활동 수업 소감 나누기를 했는데. 이 때 역시 그냥 별 생각 안하고 있다가 딱 필자의 차례가 되니 절묘하게 이전의 나누기때 필자가 했던 말들을 뇌리에서 종합해보며 보다 매끄럽고 유려하게 법문이 나올 수 있었다. 이 법문에서 한 예기가 판단하지 않는 것이 교리적으로 맞다는 것. 해서 오늘 실천활동을 하며 필자가 주로 새긴 것이 판단하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고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였다는 것. 그리고 시삼무차별. 결국 마음이 다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새기면서 내 마음의 드러남으로 보고, 또 판단하지 않고자 하니 활동이 점차 원만하게 이뤄진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전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콩트처럼. 진행자분과 이런 저런 너스레가 오갔다. 이 너스레를 보며 함께 나누기를 하는 수업 도반들이 웃음을 보였다. 이 같은 상황이후 상호간의 마음이 그렇게 열리고, 또 몰입되었을 때 필자가 의도치 않게 그냥 그 상황에서 시삼무차별의 마음이 중생(들로 구성된 상황)으로 드러나는 것과 판단하지 않는 것이 교리적으로 맞기에, 판단하지 않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볼 때는 보기만 함을 새겼다. 그러니 수업이 원만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가 나오고 나누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듣는 도반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뭔가를 이해함이 필자의 마음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참................ 

 

그러고보면 이 나누기 이전에도 오늘 필자가 실천활동에서 경험한 상황들을 살펴보자면 하나하나가 다 각자를 일깨워주는 부처님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우선 가장 처음 필자와 약 오분 ~ 십분정도 대화를 나누게 된 분께는 필자가 사실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근데 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끔 그 상대가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절묘하다. 이 이후 줍깅 활동을 했다. 그리고 줍깅활동이 끝나고 커피숍으로 걸어가는 길. 그 상황에서는 필자가 직접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옆에서 두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중간중간 들려왔는데, 역시 두 사람 중 대화를 듣는 도반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다른 한 도반이 해주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 자체가 필자가 보기에는 한 선배 도반이 깨달음으로 한 상대를 이끌어주는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도반에게 결여된 진리를 일깨워주는 그런 이야기가 설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선배 도반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라는 자각 없이 그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써보니 하나가 더 보인다. 결국 집착이 없어야 한다는 것.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것. 앞선 윗 문단에 쓴 내용 중 필자의 나누기가 원만한 시점 역시 돌아보면 필자가 생각이 적었었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을 때 그와 같이 상황이 원만할 수 있었다. 결국 집착을 비우고 상을 짓지 말고 실체시 하지 말고, 판단없이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는 것이 상황이 원만해지는 길이며, 본성인 불성이 발현되는 길이고 부처님이 상황으로서 화현하실 때라고 생각이 든다. 또 여기까지 쓰니 하나가 더 생각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원만하게 필자의 입에서 나올 때는 모두 다 필자가 집착이 줄어들고 생각이 적어진 때였었다. 결국 법사로서 법문을 하고자 한다면 생각과 집착을 줄이는 것이 상황 상황이 부처님이 화현하게끔 하는 인연을 조성하는 것임을 알겠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금강경을 독송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상을 타파해주고 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가르침이 바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과 같은 반야경의 가르침일 터이니 말이다. 다만 이 두가지의 불경만이 그와 같은 가르침의 전부는 아니다. 이 경전들 뿐만이 아닌 주력, 염불, 절 및 예배등 불교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상을 타파하고 관념에서 벗어나고 희론에서 벗어나서 해탈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일 것이다.)

 

해서 결국 진리의 본질은 자비인 것이다. 그 자비는 중생들을 일깨워주며 무명 번뇌에서 벗어나서 진리와 합치되고 하나되게끔 이끌어주는 자비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니 또 느껴지는 바가 있다. 결국 오늘 필자가 경험한 일련의 상황들 중 중후반부 까지의 상황들은 모두 실전활동 이전의 필자가 조원 도반분들에게 가진 상의 나툼(나타남)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시삼무차별의 마음이 중생으로 나타남을 오늘 실천활동의 중후반부까지 경험하였고, 

필자가 활동을 하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번뇌에 끌려가지 않고

일어나는 느낌 감정을 판단없이 바라보고, 또한 만난 도반분을 모두 필자의 마음의 나타남으로 보고 결국 나 자신에게 대한다 생각하여서 잘 대해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고, 그리고 나누기를 할 때는 상대의 말은 판단하지 않고 들을 땐 듣기만 하고자 노력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수행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니 후반부에 필자의 생각이 적어지고 상황이 절묘하게 진행자분을 필두로 한 도반분들로 인하여 연출되면서 아름다운 법담이 나오고 도반분들께 이익을 줄 수 있었음과 더불어 그 상황 속에서 절묘하게끔 필자가 법담을 보다 매끄럽게 원만하게 할 수 있게끔 질문자님이 말을 중간에 끊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와 절묘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필자는 '아 이것이 부처님이었구나.' 라고 느낄 수 있었다.

 

상황 자체가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의 관념을 떠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해서 무상 무아에 반하는 항상하고 독립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는 중생의 희론, 분별, 망상, 전도몽상, 사견으로는 결코 부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써보니 이 구절이 떠오른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만약에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

-《금강경》中 -

해설 출처 : https://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493

 

 

참 오늘 좋은 경험을 했다.

오늘 실천활동이 끝나고 느꼈다.

정토회는 참으로 대단하고 좋은 단체다.

 

결국 정토회 전체가 곧 부처님인 것이다.

 

우리는 모자이크 붓다입니다 라는 명심문을 외는 수행공동체.

 

참으로 엄청난 곳이었다.

 

이런 단체를 일궈내신 법륜스님 그간어 존경했지만 다시금 새롭게 느껴진다.

 

이런 정토회의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불법승 삼보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아 그리고 오늘 추가적으로 느낀 바는

 

도반의 중요성. 경청자의 중요성. 학습자의 중요성. 법문을 들으러 와주는 신도들의 중요성이었다.

 

예전에 필자가 다니는 사찰에서 당시 포교국장이셨던 스님이 이런 법문을 해주셨었다.

 

들어주는 분들이 없이 혼자서만 (불교 교리) 알아봤자 쓸 데가 없다고. 써먹을 데가 없다고.

해서 들어주는 분들이 참 고마운 분들이라고. 대충 이런 내용의 가르침을 당시 법문에서 주셨었다.

이때 이 가르침을 필자가 전체를 말끔하게 명확하게 듣지 못하여서 이정도로 기억하는데

이 가르침을 듣고 당시 이 가르침 내용이 잘 이해가 안갔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계속 의문이었었는데

오늘 비로소 조금 이 가르침을 이해한 것 같다. 조금. 전체는 아닐지 모르기에 조금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조금이든 전체든. 여하든 조금 이 가르침을 이해한 것 같다. 

 

정말 그렇다. 이 가르침대로였다. 

 

나라 할 게 없었다.

모두가 연기한 것이었다.

해서 나라고 생각하는 이 관념이 지칭하는 이 심신 오온으로 인한 법문 한구절이 나와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법문을 들어주는 경청자, 상대방이 있어야 하고,

그 상대방과 내가 만날 수 있는 모임이 있어야 하고,

그 모임이 발생할 수 있는 단체가 있어야 하고,

필자가 어떠한 주제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주는 진행자분과,

그 모임이 성립가능하게 해주는 다른 도반분들과,

그 모임 자체가 이뤄지는게 원만하게 될 수 있게끔 해주는 단체의 다른 모임의 참석자분들.

그리고 그 단체의 운영진분들, 구성원분들.

그리고 그 단체를 이끌어가는 스님.

그리고 그 단체가 세상에서 활약할 수 있게끔 해주는 여러 역경계들과, 그 역경계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오늘의 모임이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을 대여해주는 커피숍. 

그리고 필자가 아는 지식을 필자에게 전달해준 다른 스님들, 법문들, 책들.

그리고 이 모든 근원에서 팔만사천법문을 펼치신 석가세존.

그리고 이 일련의 모든 현상들이 발생할 수 있게끔 해준 이 우주 법계.

이 우주 법계의 발생지인 공성. 마음. 

결국 이 일련의 모든 것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실천활동이 원만할 수 있었고,

그 실천활동 안의 나누기 수업이 원만할 수 있었고,

그 나누기 수업에서 나는 나대로 법담을 자연스럽게 집착없이 잘 해고 잘 전달될 수 있었고

그 상황을 알아차림하면서 또한 나는 나대로 시삼무차별의 아직 확연치 않았던 부분인 중생이 부처님고 마음이 부처님이라는 이치를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이를 경험하며 나는 나대로 이타행, 각타행을 하고, 더불어 상황은 상황대로 나에게(필자에게) 시삼무차별을 확실하게 경험하고 볼 수 있게끔 해주며 필자는 필자대로 자리를 경험하고 자각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자리이타와 자각각타가 동시에 실현되었다. 이 상황이 결국 부처님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구성하고있는 필자를 비롯한 진행자님과 돕는이 봉사자분과 나누기에 참여한 도반분들을 비롯한 법계 일체 중생 모두가 곧 부처님이었고 말이다.(특히 이 상황이 부처님이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렇게 써보니 또 하나 통찰이 되었다. 자각과 각타는 둘이 아니고, 자리와 이타는 둘이 아님을. 이것은 동시에 발생되는 것임을 느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시간차가 있을 수는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결국 한 현상은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발생하는 것임을 오늘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곧 천태교관의 원융의 이치일 것이다. 공가중 삼관. 십계호구. 그리고 오늘 자리와 이타. 자각과 각타 역시 원융적 이치에 포함되는 것임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참................ 오늘 좋은 경험을 하였다.

 

나는... 필자는 정토불교대학을 잘 졸업하고 꼭 정토회에 들어가고 싶다.

이 같은 꿈이 오늘 생겼다.

 

정토회가 결국 한분 한분의 모자이크붓다가 모인 부처님임을 오늘 느꼈기 때문에 이 같은 마음이 강해졌다.

 

오늘 환경실천활동을 하러 가기 위해 만난 그 시점부터 해서 실천활동을 하러 가고, 실천활동을 하고, 실천활동이 끝난 이후 커피숍으로 걸어가고, 커피숍에서 한주 나누기 수업을 진행하고 수업이 마치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느낀 바를 기억나는대로 적어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전철역으로 도반분들과 함께 이동하는 가운데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때도 맑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갈 때는(특히 필자의 입에서 맑은 내용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필자의 생각이 없을 때였다. 집착이 덜하고 지금 여기에 깨어있을 때였다.)

 

오늘 참 좋은 경험을 했다.

 

법륜스님께

그리고 오늘 수업을 함께 한 도반분들께

정토회의 모든 구성원분들께

부모님께

가족분들께

친척분들께

조상님들께 

그리고 법계 일체중생들께

부처님께

가르침에

스님들께

아미타부처님께

관세음보살님께

감사하다.

 

나무 시방삼세 일체존불

나무 시방삼세 일체존법

나무 시방삼세 일체존승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

 

필자는 오늘 부처님을 보았다.

부처님은 중생의 관념을 떠나서 있는 분이셨다.

실체적인 관념을 떠나서 연기를 볼 때 부처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처님이라 이름하는 현상에는 사실 부처님이라 할 만한 실체가 없었다.

연기하는 현상에는 주(主)라 할만한 실체가 없음으로.

 

결국 오늘 필자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단 한마디 말도 한 바가 없다.

 

오늘 필자는 많은 경험을 했지만

단 하나의 경험도 한 바가 없다.

 

이 같은 일련의 내용이 결국 금강경의 3분의 내용에 가까운 내용이라 할 수 있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필자는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이상 글을 마친다.

 

여기까지 쓰니 눈물이 살짝 난다.

 

ㅎㅎ..

 

불법승 삼보님께 감사합니다.

나무 불법승

나무 석가모니불

 

오늘 뵈어서 좋았습니다 부처님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