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불교는 생명살리는 가르침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5. 2. 2. 23:32

불교는 생명살리는 가르침입니다.
왜냐구요?
불교에 귀의하면 오계를 받습니다.
오계의 첫번째가 불살생계입니다.
그다음이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계이죠.
불교는 인과법입니다.
인연법이고 연기법이고 마음법이지요.
불교는 인과법이기 때문에 나의 행위가 중요합니다.
생명을 살리면 세상도 나를 살려줍니다. 방생을 하면 장수보를 받습니다.
생명을 해치고 죽이면 나 역시 단명보를 받습니다.
광우스님의 소나무는 이러한 인과법을 전해주고 신심을 갖게 해주는 참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큰 스님께서 제게 광우스님의 소나무를 추천해 주셨지요.
여하튼 불교는 인과법입니다. 뿌린대로 거둔다고 합니다.
자작자수라고 합니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다고 합니다.
불교는 계정혜 삼학입니다. 최우선적으로 계를 지키는 것이 기본중의 기본이오 삼발이 냄비의  하나의 다리가 바로 계학입니다. 오계를 지키고 십선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일타큰스님의 오계이야기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오계에 대하여 좋은 가르침과 설화들이 담겨있는 좋은 책입니다. 효림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입니다. 가격도 참 저렴합니다. 효림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은 하나같이 모두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불교에 입문한 분들께 낱권의 책보다는 효림출판사를 추천드립니다. 효림출판사의 잡지 월간 법공양도 참 좋습니다. 일년에 이만원정도였나? 금액을 내면 매달 법공양 잡지가 날라옵니다. 그런데 이 잡지의 내용이 참 알차고 좋습니다. 여러분도 법공양도 구독해보시고 효림출판사 책들을 많이 많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불교를 몇년 이상 공부하신 분들에게 있어서도 한결같이 좋은 책들이 효림출판사의 책들입니다.

말이 조금 샜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렇습니다. 불교는 인과법입니다.
선인락과 악인고과를 말합니다. 불교는 주체적인 종교입니다. 자극과 반응의 법칙이 있죠?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백이 있다고. 그 공백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힘들고 괴롭고 불안하고 두렵고 슬프고 화나는 등의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을 역경계라고 합니다. 반대로 즐겁고 신나는 일들은 순경계라고 하죠. 사람들은 역경계를 만나면 울상을 쓰고 순경계를 만나면 즐겁게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자는 다릅니다. 불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불자는. 수행자는. 그런 경계에 일회일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계가 닥치더라도 이런 경계가 닥쳤구나 알아차립니다. 그런 경계를 마주하니 내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 느낌 생각 감정 충동도 잘 알아차립니다. 이 심신에서 이런 경계가 일어나는구나.  그리고 그 심신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단지 바라봅니다. 관찰합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합니다. 그 현상들에 수행자는(불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내버려둡니다. 단지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할 뿐입니다. 바라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이라 하셨습니다. 일어난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항상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하셨습니다. 불자는(수행자는) 이 제행무상의 이치를 알기 때문에 단지 바라봅니다.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둘 뿐입니다. 단지 바라볼 뿐입니다. 그렇게 알아차리기만 할 때. 바라보기만 할 때.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둘때. 마법이 일어납니다. 일어난 경계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사라진다는 것을요.

불자는 이렇게 경계에 일회일비 하지 않고 알아차림이란 중도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불자는 계를 지킵니다. 오계를 지킵니다. 오계의 첫번째는 불살생입니다. 불살생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더 명확히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생명을 방생하는 것입니다. 살려주는 것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과거생에 자신의 어머니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범망경을 비롯해 여러 경전에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더 명확하게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중생은 모두가 과거생에 너의 어머니이기도 했고 아버지이기도 했고 형제 자매였기도 했다고. 일가친척이기도 했고 선망조상이기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문장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내용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셨다는 예기입니다.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그 무엇하나 고통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죽음을 싫어한다고요. 심지어 작은 개미조차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서 부처님은 내가 고통을 싫어하고 괴로움을 싫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그 마음으로 다른 생명의 아픔과 고통과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럽고 싶지 않듯이, 저 작은 개미조차도, 지렁이조차도, 저 작은 날벌레조차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싫어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다른 생명의 고통에 괴로움에 두려움에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게끔 하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게 오계를 주셨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계의 제 1계는 불살생계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살생하지 않고 해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을 살리고 방생하는 것. 그것이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인과법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살생계를 지키며 다른 생명을 많이 방생한다면 그와 같은 불살생계를 지킨 자신 역시 장수를 하는 과보를 받게 됩니다.

이 불살생계부터 시작하여 불자는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계를 지킵니다.
해서 주지않은 것을 갖지 않고 보시하고, 더 나아가서 보시바라밀을 합니다. 함이 없는 보시를 합니다. 그리고 사음하지 않고 청정하게 삽니다. 더 나아가서 끊임없이 수행정진하며 자신의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고 탐진치를 소멸시키며 본래 청정한 본래면목을 찾아나갑니다. 그리고 거짓말 욕설 이간질 쓸데없는 잡담이나 아첨을 하지 않고, 나와 남을, 모든 생명을 살리는 진실된 말 화합하게하는말 따스한 말(격려 등)을 하고 법보시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웠다면 이를 잘 사유하고 실천해서 그 가르침을 내것으로 만든 뒤 주변인이 괴로워할 때면 내가 배우고 잘 알고있는 법문 한구절일지라도 말을 해줍니다. 아니면 내가 본 좋은 법문이나 불서를 소개시켜줍니다. 이렇게 불자는 나와 다른생명 모두를 살리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불자는 술을 비롯한 중독성물질을 섭취하지 않습니다. 중독도 되지 않습니다. 탐닉하지 않습니다. 늘 맑게 깨어서 살아갑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늘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불자의 삶은 곧 수행이 됩니다. 불자의 생활은 곧 수행이 됩니다. 하여 설거지를 할때도 밥을 먹을때도 불자는 늘 깨어있습니다. 깨어서 밝게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고 무상하고 실체없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심신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면서 그 현상들이 연기(조건에 의존하여 발생됨)한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꽤뚫어보면서 그 현상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인식합니다. 더불어 그 현상이 이슬 번개와 같이 찰나지간에 생멸함을 압니다. 그렇게 현상들을 바라보며, 그런 현상에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을 압니다. 해서 불자는 육신과 정신작용(오온)이 내가 아님을 압니다. 그 물질현상과 정신현상에는 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음을 압니다. 그렇게 밝게 알고 불자는 늘 깨어있으며 자신의 심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실체없을 관찰하며, 그 현상들을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항하지 않습니다. 거부하지 않습니다. 허용하고 수용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현상들은 하늘에 뜬 구름과 같은 것임을 알고 바다에 잠시 일어난 파도와 같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상들은 꿈같고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이 실체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런 현상들에 저항하지 않고 허용하면서 늘 깨어있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불자는 날마다 오계를 지키고 염불 독경 참선 절 예배 사경 주력 수식관(호흡명상)등의 수행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불자의 삶은 밝습니다. 나날히 밝아집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불자는 기본적으로 오계를 지키기 때문에.
결국 다른 생명을 살리고, 동시에 자신을 살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살리고, 친척들을 살리고, 조상님들을 살리며, 일체중생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자는 오계를 지키고 육바라밀을 닦습니다.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합니다.
보시도 합니다. 계를 잘 지키고 화나고 괴로울 때는 인욕을 닦습니다. 그렇게 공부하고 수행하고 복과 지혜를 닦아나가며 불자는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쌓은 공덕을 법계에 회향하고 중생들에게 회향하고 보리에 회향합니다.

그와 같은 불자의 삶은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입니다. 자리이타요 자각각타입니다.

이와 같은 불자의 삶은 나를 살리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오계를 지키는것만 봐도 그러하지만, 더 나아가서 계정혜 삼학도를 닦아나가고 육바라밀을 닦아나가고 불교공부를 하고 수행을 해나가는 그 삶 역시 동일합니다.

나를 살리고 다른 생명들을 살린다는 점이 말입니다.

하여 저는 불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불교는 생명을 살리는 가르침이다. 라고요.

해서 한 사람이 불교에 귀의한다면 이로 인해서 많은 생명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의 불자는 많은 생명을 방생하고,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행위로서 세상을 밝힙니다. 계를 지키고 정학을 닦으며 불자는 나날히 지혜가 밝아집니다.

그 한 사람의 불자로 인해서 많은 생명들이 직간접적으로 이익을 얻게 됩니다.
많은 생명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 불자 역시 살아나게 됩니다.
불자는 자신이 지은 공덕을 법계에 회향합니다.
이로 인해 법계도 밝아지게 됩니다.
심청정 국토청정인지라, 나날히 공부하고 수행하며 밝아져가는 그 불자의 주변인들 역시 그 불자의 밝은 마음이 비춰져 함께 마음이 밝아지게 됩니다.

일즉다 다즉일이오, 세상은 인드라망인지라

그렇게 만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해서 불교는 생명을 살리는 가르침입니다.


2022년에 노트에 적어놓은 글을 읽고서 그당시 했던 이 같은 생각이 떠올라서 이렇게 글로 풀어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