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를 허공의 꽃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구세십세호상즉이란 말도 있다.
모두 유위법의 삼법인의 특성을 담고있는 가르침이라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하여, 불사조차도 허공의 꽃이라고 하는데,
세속적인 인간사야 오죽하겠는가.
무량겁조차도 결국 유위법인 이상 깨보면 그저 한줌의 꿈이었을 뿐 아니겠는가.
이 예기를 왜 꺼내는가.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하라고 가르침을 설하신다.
여기서 유위법이란 인연생기한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 인연생기하는 현상(작용)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현상은 여몽환포영이고, 더불어 여로역여전이다. 현상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같고, 그런 실체없는 현상은 항상 변화하며, 일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고, 그렇게 소멸하기까지의 시간은 이슬 번개와 같이 찰나나 다름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예기를 왜 하는가.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는 예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나라고 할 만한 자아나 상대라 할 만한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나라고 할 만한 영혼이나 상대라 할 만한 영혼은 없다는 것이다.
자아나 영혼이 없음으로 목슴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사실 중생이라 이름붙일 것도 분석해보면 결국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사유해보자면, 결국 제법무아. 즉 모든 존재(현상)들에게는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음을. 자아가 없음을. 영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대승에서는 무자성 공이라고 표현한다. 제법무아가 곧 제법무자성이오 제법이 공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더 사유해보자면 내가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원수라 할 실체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저 악인들, 내가 저 원수들과 같은 조건에 처해있다면 나도 저 악인들(원수들)과 똑같은 개념없고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무지하고 건방지고 무례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똑같이 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제법무아이기 때문에. 결국 연기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저들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서 똑같은 조건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아서는 똑같은 위치에 처해있다면 나는 나에게 무례하게 굴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화나게하고 나에게 악업을 짓는 저들과 '똑같은' 신구의 삼업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최근 이 사실을 통찰하였다.
이 사실을 통찰하게끔 된 조건은 일단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여러 훌륭하신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연기법과 제법무아 제법공사에 대하여 사유한 것이 첫째지만, 동시에 커다란 하나의 다른 조건이 있었다. 바로 틱낫한 스님이 지은 책 <틱낫한의 평화로움>(틱낫한 지음, 류시화 옮김) 에 나온 가르침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이 같은 내용을 보았다.
그 내용이 참 인상깊었다. 그 내용이란 이러하다. 태국 근처에서 한 소녀가 해적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틱낫한 스님은 자신이 그 해적과 같은 조건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면 자신도 그 해적과 같은 짓을 저질렀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더불어 틱낫한 스님은 이런 가르침을 주셨다. 결국 자신은 세상의 삼라만상 모든 것이라는 가르침을. 이 가르침이 책에서는 아름다운 시로 잘 풀어져있다. 이 시에서 틱낫한 스님은 이런 메세지를 주신다. 자신은 세계 각지의 여러 사람들이라고. 서로서로 반복하는 집단. 서로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는 사람들. 그 각각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라고. 필자는 이 시를 읽고 결국 제법무아이니, 틱낫한 스님이 그들과 같은 조건이었다면 그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이해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여러 단계의 법문을 하신다.
그 중 재가자들에게는 복을 짓고 천상에 태어나게끔 하는 법문을 펼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법문이 수준이 낮은 법문이라거나 그런 말이 아니다. 이 법문 역시 매우매우 중요하다. 본래 제법은 무유고하 아니던가. 어쨋든 이런 법문들 중 부처님께서 이런 법문을 하신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중생들의 주인은 그 중생의 업이라고. (내용이 명확히 이런건 아니다. 필자의 기억을 그냥 적은것이다. 실제 법문은 더 자세하다. 찾아보시길 바란다.)
필자는 이 법문을 이렇게 이해한다. 중생들은 알아차림이 없고 반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범부 중생들은 반야의 지혜가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재가자분들도 있지만. 그런 분들을 제외한 중생들은 이와 같다. 그럼으로 이런 중생들은 경계를 맡딱뜨렸을 때 정견을 하지 못한다.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실체시를 하고 집착을 한다. 해서 성내거나 탐낸다. 이런 중생들은 다시금 말하지만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다. 그럼으로 이런 중생들의 주인은 이런 중생들의 업력, 업습, 업이다. 그 업습의 관성대로 이런 중생들은 살아가는 것이다.
이 법문의 내용도 앞서 적은 내용과 연결되는 맥락이 아닌가 해서 덧붙여본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새겨본다면 알 수 있다.
내가 만약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과 똑같은 조건이었다면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악업을 짓고 어리석게 살아갔을 것임을.
이를 아니 필자는 이해가 되었다. 필자가 그동안 미워했고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원수들이.
저들의 조건에서는 저럴 수 밖에 없는 것임이 이해된 것이다.
(이 연기법 - 제법무아의 지혜를 자신에게 적용하면 지난 일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조건이었으니 후회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 이 부분은 필자의 통찰이 아니라 <인생과 싸우지 않는법/곽철환 지음/불광출판사> 라는 좋은 불서에서 필자가 배운 통찰이다. - 그럴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훈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경험으로 삼고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기반으로 똑같은 어리석음을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법과 제법무아의 지혜를 적용해서 원수들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니 결국 세상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생각되었다.(더불어 이슬 번개같이 무상하기도 하고 말이다.)
결국은 나라 할것도 너라 이름붙일 실체도 없으니
결국 하나의 풍경이 흘러갈 뿐이었다.(풍경이란 표현으로 공성을 비유한 것은 자무스님의 법문에서 나온다. 자무스님의 법문들 참 좋다. 필자도 최근 자무스님의 법문들을 듣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참... 명쾌하고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바보붓다 채널에서 자무스님의 법문들을 들을 수 있다.)
다시 말해보겠다.
결국은 나라 할것도 너라 이름붙일 실체도 없으니 결국 하나의 풍경이 흘러갈 뿐이었다.
이것이 진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진실속에서 나는,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그 답이란 결국
경계에 일회일비하지 않고,
무상의 길이 아니라
영원의 길을 걷는것이 그 답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자타불이.
결국 모든 분별 망상 전도몽상에서 벗어나서
일체의 분별 희론 망상 생각을 여의고
불이법을 체득하고
자타일시성불도를 지향하는 것이.
이와 같은 불도를.
보살도를 걸어나가는 것이 그 답이 아니겠는가.
중생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방일이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는 서원(사홍서원, 여래십대발원문 등)을 세우고
이 서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영원의 길.
즉 정진이라는 영원과 무한으로 향하는 길이
꿈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나무 불법승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
<이해에 대한 법륜스님의 가르침이 나오는 좋은 영상 하나를 아래에 덧붙입니다. 함께 봐보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ZxkLqD39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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