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제 : 관여하지 않는 길과 관여하는 길
부제1 : 현 정국과 윤석열 대통령으로 나툰 비로자나부처님의 가르침 - 두가지 길{아수라의 길과 제석천의 길(제석천의 길의 상위호환은 아잔브람스님이 저서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설하신 방법 : 제법무아 중중무진법계연기를 알고 이 앎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현상은 인연의 영역이고 인연의 일이지 있지도 않는 '자아'라는 실체의 일이 아님을 알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단지 알아차림 한 뒤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으로 행하는 수행으로 돌아오는 길)}
(※사상에 대한 설명 :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m/5692)
부제2 : 영원히 갈등이 발생하는 아수라의 관여하는 길과 영원히 갈등이 발생되지 않는 제석천을 넘어선 아잔브람스님의 관여하지 않는 길
윤석열 대통령은 인과법을 알았음에도 이를 잊고 무명이 밝음을 가려서 자타에 대한 실체적 관념이 있다고 여기며 여야와 자타와 아군 적군을 구분지으며 치성한 경계를 힘으로 굴복시키고자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 과보로 야당의 거센 반발반응이 발휘되었고, 그것이 대통령 직위까지 앗아갈 칼날로 변하여 금새 탄핵안이 발휘되며 윤석열 대통령의 목을 겨눈 상황이 되었다. 정국이 어떻게 변화할 지는 현재로서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기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에게 많이 위태로운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 :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m/5421
실체시(집착)해서 탐심과 진심내면 경계는 사라지지 않고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난다. 인과법이기에. 내 마음의 탐심 진심을 법계는 그대로 반영해주는 거울과 같다. 하지만 오온무아 제법무자성 제법공상 중중무진법계연기를 알아서 실체시하지 않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갖지 않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경계를 알아차린 뒤, 그 경계가 유위법이며 유위법이기에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임을 즉 헛깨비고 환영과 같은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고 이름붙일 이름이 없는 것이고 본래 없는 것임을 알고, 내 호흡 등의 수행으로 돌아오면. 즉 실체시하지 않고 관여하지않고 내버려두고 관심갖지 않고 알아차린 뒤 내 수행으로 돌아와 호흡을 관하는 등 (자리이타의 길인)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경계는 알아서 소멸한다. 연기법의 특성이 무상이기 때문에. (연기법의 특성은 제행무상 제법무아이며 중도이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이 마법과도 같다는 표현을 사용해서(아마 그랬던 것 같다 기억상) 성난 물소 놓아주기 책에서 나의 일이 아님을 알고, 제법무아임을 알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관심갖지 않고 호흡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었다. 그 가르침을 조금 더 풀어보자면 이와 같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됨을 알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그 나 자신이라고 그간 여겨왔던 색수상행식 오온과 외부경계를 비롯한 일체의 인연생기하는 현상은 무자성(실체가 없음)임을 알고 수행적으로서 분별하지도 말고 의미부여하지도 말고 개념이나 이름을 붙이지도 말고 다만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생각이 일어나면 다만 일어났음을 있는 그대로 알 뿐인 식으로 판단분별하지 않고 다만 알아차린 뒤,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더 이상 관심갖지 않으며, 잠시 경계로 이동한 주의를 수행으로 돌리고 수행을 해나갈 때 경계는 알아서 소멸된다.}
이 상황을 보며 내가 그간 살아오면서 겪었었던 원증회고의 상황이나, 지금 윤석열 대통령과 야당과의 갈등이나 다를 것이 없음을 느꼈다.
내가 중중무진법계연기
{중중무진법계연기 여기에는 제법무아의 개념까지 포함되었음이 오늘 통찰됨 - 24.12.25. 나는 없다. 연기가 있을 뿐. 인연생기하는 현상이 있을 뿐. 현상은 이름 붙일 자성이 없기에 둘일 수 없다. 이게 양자역학에서는 광속하고는 비교도 안되게끔 그냥 이쪽에서 파동 일면 우주 엄청나게 먼 곳에서도 똑같이 양자(?)가 진동한다는 이치로 나타남. 결국 일체의 현상은 일체라 할 것이 없이 하나의 현상인 것임. 연기란 (필자에게 붓다브레인을 교재로 수업해주신 훌륭하신 스승님의 가르침과 같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임. 연결 안된 것이 없다는 것임. 그리고 그 연기하는 현상은 근본적으로는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에, 무명이 없던 명이던 시절엔 본래 없다는 것이 광덕스님의 가르침임. 근데 본래 없기도 하지만서도, 현재는 있는가 하면 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고, 그 현상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이 실체가 없어서 결국 그 현상의 본질을 관하면 이름 붙일 만한게 없고, / 그걸 수행적으로 체험하면 아마도 (필자는 18계에 대하여 공부하던중 아 모든것이 공하구나 라고 생각이 딱 든 순간 자신의 육신이 사라지고 시원하고 청정함이라고 할만한 감각을 느끼며 찰나 찰나 일어나는 생각이 물방울이 떠오르는 것과 같이 천천히 생멸하는것이 알아차려지기도 하고 하지 않겠는가 싶다. 이건 필자의 체험담인데 매우 일시적인 경험이고 이 체험의 마지막부분엔 바닷쇠 밑으로 헤엄치듯 헤엄쳐가는데 막힌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에 막힘을 알고 조금있으니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된다만.. 체험적인 부분은 필자도 잘 모르겠다. 적어도 필자가 앞서 쓴 이 체험은 느껴지는것이 있었고 시작과 끝이 있었고 인식되는것이 있었고 생멸이 있었기에 그저 유위법에 속한 영역의 수준낮은 체험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직 이 경험이 어떤 영역을 경험한 것인지 필자 스스로도 모른다. 다만 필자가 경험한 그 청정하며 그 텅텅 빈 곳이 결국 진여 불성 본래면목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아 뭐 이것도 맞긴 한듯 한데, 정확한 문장 떠올랐다. 본래 없기도 하지만, 현재도 실체는 없이 현상만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나, 사막에서 볼 수 있는 신기루, 하늘의 오로라나 무지개, 포그스크린, 안개 등은 현상은 있지만 실체가 없기에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하지만 이름 붙일 것이 없기에 허공과 다름이 없어서 그냥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구만. 없는 것이나 다름 없네. 그냥 묘하게 이름붙일게 없는 헛깨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그냥 꿈일 뿐이구만. 현실에서 내가 마주치는 순경계 역경계 일체가.. 이제 제대로 통찰이 되네. 걍 싫은 것들도, 나라고 여겼던 이 오온도. 사실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름 붙일 게 없어서. 아하. 이름 붙일 자성이 없다. 이름 붙일게 없다. (고로 이름에 끄달리지 마라. 언어는 실상을 표현해주는게 아니다. 있지도 않은 관념을 의미하는 것이지. 다만 중생들에겐 방편으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뿐. 무자성이기에 이름은 뭐라 붙이든 상관 없는 것이다. / 다만 붙인 이름이 실재한다고 집착하는순간 원융의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 뿐. 좋은걸 잡고자 하면 사실 무자성 공은 관계성에 의하여 인연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것이기에, 즉 다시말해서 실체가 없는 것은 보는 시각이나 관계성에 의해 다양한 면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에, 한쪽 면만 잡고자 하면 다른 면도 반드시 함께 들어나게 되는 것인 듯. 공덕천을 흑암천이 반드시 함께 다니듯, 실체시를 하게 되면 그 현상의 반대되는 측면도 함께 들어나는 것이 현상세계의 실상. 실체시하면 원융이 발생되는 것이다. 이를 알겠다. 해서 필자가 예전에 만났던 한 스승께서는 콜라캔을 두고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보이는 면이 달라짐을 알아서 한 면만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아우르며 본질을 꽤뚫을 수 있어야 한다는 법문을 해주신 것이구나. 코끼리와 장님들 경전이야기에 빗대서 말이다. 한쪽만 보지 말라는 가르침. 결국 이 원융적 이치가 초기불교에서는 공간적연기의 가르침인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고.. 결국 그러니 이름 붙이지 말고 무아행을 하자. 바히야경에 나오듯.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은 듣기만 하자. 분별 없이. 갓 태어난 신생아가 세상을 보듯이. 실상은 이 생각 분별이란 어리석음 번뇌만 제하면 제법이 불이법 즉 둘이 아니니까 말이다.)}
의 일이기에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님을 알고 관여하지 않는 지혜를 통찰한 어제의 시점에 이 경계(계엄령)가 발생되어 드러났다.
이에 대하여 느껴지는 바는,
내가 최근 통찰하게 된, '나'의 일이란 없고 모든게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일이기에 관여하지 않으며 내버려두는 비움의 길을 가면서, 탐진치(만,게으름,지루함 등) 삼독 번뇌를 비우는 수행의 길을 가는것이 바르며, 대통령 역시 이 같은 수행의 길을 보리심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자리이타의 보살도로로서 나아가며,
아상, 실체적 관념, 이분법(언어에 해당하는 실재가 있다는 어리석은 관념 - 즉 언어로 이뤄진 생각이 번뇌인 줄 모르고 생각의 내용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세우는 길이 아니라,
아상, 아집, 소아(小我)를 버리고 중중무진법계연기(이 중중무진법계연기라는 현상은 본래 없던 것이다. 불성에서 임시적으로 일어난 묘한, 실체가 없어서 이름붙일 이름이 없는 헛깨비고 신기루고 꿈일 뿐이다. 근데 이것도 결국 불성이란 하늘에서 일어난 구름이니, 이 역시 결국 공이 현상으로 나타난것 - 공즉시색 - 임으로 이 역시 불성의 현현이다. 불성이란 바다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라 할 수도 있다. 생각도 그렇지만, 이 육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육신도 내가 아니다. 생각이 연기하듯, 이 육신도 생각보다 좀 오래 머물다가 소멸될 뿐 생각과 다름 없는 헛깨비라는 것이다. 고로 집착할 게 없다. 부루나 존자와 같이.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5599 )이자 한마음이 진아임을 알고,
자신을 모욕하는 이들에 대해선 폭력과 몽둥이로 다스리려 들고, 어리석은 이들이 자신이 겁먹었다고 생각하는걸 싫어해서 폭력을 쓰는 아수라왕의 길이 아닌,
위에 적은 이치(연기법)와 더불어 인과법을 알고 자타가 평화로운 결과를 위해 인욕하고 참는 '제석천의 자리이타의 길'이자 '아잔브람 스님의 제법무아의 이치에서 근거한 관여하지 않는 수행의 길'을 걷는 것이 나에게만 정답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정답이었구나. (아잔브람스님의 수행의 길은 월호스님의 아바타 수행법과도 같은 길이다.)
이를 오늘 느꼈다.
그리고 보니 법계 법신부처님(비로자나부처님)께서 내가 용타스님의 <생각이 길이다>와 아잔브라흐마 스님의 <성난 물소 놓아주기>책을 공부하고 연기법에 대하여 사유하며 통찰된 바를 더 명확하게 알라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경전구절> 책에 나온 아수라왕과 제석천의 대화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야당과의 대치구도가 벌어지고 있는 현 정국으로 나투어 내게 가르침을 준 것이리라고 느껴진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글에 적은 나와 같은 지혜가 있었다면
스스로의 일신의 명예와 분노 등 실체시(實體示)에 사로잡혀 진심(성내는 마음)으로 업을 짓는것이 아니라,
※https://ko.wikipedia.org/wiki/%EC%8B%A4%EC%B2%B4
<실체(實體)는 언제나 있으며 없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변전(變轉)하는 것의 근저(根底)에서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본체(本體)라고도 한다. - 위키백과>
제석천의 길을 갔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연기법과 제법무아를 근거로서 역경계(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상황)에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둠과 더불어서 그간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심신(心身)까지 인연(중중무진법계연기)에 맞기는, 부처님이 가셨고 아잔브람스님이 가신 이 길을 가셨을 것이리라.
해서 관여하지 않을 때 야당이나 진보 언론들 등이 행정부에 반발하려 드는 이 치성한 업장은 결국 업장소멸로 이어졌을 것이고,
야당대표는 (자신이 지은 악업의 과보로 인하여) 알아서 굴러떨어졌던가,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중요한건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이란 자충수를 두지 않아서 적어도 현재와 같은 위기에 처하지는 않고 임기는 모두 마칠 수 있었을 것이리라.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께서 대통령 직위에 오르셨다면 적어도 필자가 위에 적은 연기법과 제법무아(제법무자성, 공, 반야)에 대한 지혜는 없을지라도,
소아(小我)적 삼독심이 일더라도 일신의 명예나 영부인께서 언론을 통해 욕을 먹는 그런 사적인 일 보다는 전 국민과 전 세계의 평화를 더 중시하여서 대통령이란 '역활'에 충실했어야 하리라.
대한민국 공무원 중 가장 작은 권한을 갖는 계급은 아마도 헌역 병사 중 분대장일 것이고, 가장 높은 계급은 대통령일 것이다.
불교의 <마음을 다스리는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 글에서 가장 하단에 굵은 글씨로 표시해둔 부분을 읽어보라.
마음을 다스리는 글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도는 안정에서 생기고,
명은 화창에서 생기니.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며,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입을 조심하여 착한 말 바른말 부드럽고 고운 말을 언제나 할 것이며,
몸을 조심하여 나쁜 친구를 따르지 말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하라.
이익 없는 말을 실없이 하지 말고,
내게 상관없는 일을 부질없이 시비하지 마라.
어른을 공경하고 덕 있는 이를 받들며,
지혜로운 이, 미거한 이를 밝게 분별하여 모르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라.
오는 것을 거절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내 몸 대우 없음에 바라지 말고, 일이 지나갔음에 원망하지 마라.
남을 손해 하면 마침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재화(災禍)가 따른다.
- 법요집 (동국대학교 정각원 편찬) -
우선 밑출 쳐둔 가르침은 필자가 이 글의 상단에 적은 연기법과 제법무아에 근거하여 '나'의 일이 아닌 '인연'의 일임을 알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밑에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재화(災禍)가 따른다. 는 내용.
이 말은 주어진 권한(부하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명령권한)을 자기 자신의 이기심이나, 그 사적인 이기심 탐심 분노를 위하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그 행위로 인하여 도리어 재앙과 화라는 결과(과보)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불교는 행위를 업이라 한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업은 씨앗과 같아서,
콩심은데 콩이 나고 팥심은데 팥이 나듯
선업을 지으면 즐거운 결과인 락과를 받고 악업을 지으면 괴로운 결과인 고과를 받는다.)
그럼으로 적어도 대통령께서 화가 나는 역경계는 뿌린대로 거두고 지은대로 받는다는 인과법을 새기며 잘 참아내시고, 대통령의 역활인 국가와 국민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하여 주어진 권한을 '역활'에 맞게 사용했다면 좋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안타까운 일이다. 관세음보살..
<안온, 후회없음, 근심없음의 원인이자 부처님들이 칭찬하시는 일 = 성냄을 죽임>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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