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 북리뷰 블로그 칼럼

세상 일이 내 뜻대로 안되는 이유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26. 13:18

법계의 모습은 
1. 중중무진법계연기
2. 인드라망
3. 일즉다다즉일 = one for all, all for one = 하나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하나를 위함
4. 일념삼천
5. 연기
 
하는 것이다.
 
이 연기하는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그럼으로 연기하는 현상에는 자아도 없다.
자아가 없기에 제법무아이다. 
 
제법무아이기에 자아는 없지만 현상은 존재한다.
다시말해서 자아는 없지만 인연생기법은 존재한다.
 
그럼으로 세상의 일은 있지도 않은 '나(자아)'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나'의 욕심대로 될 때도 있고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이유는 세상 일은 있지도 않은 '나'의 욕심이나 중생의 신구의 삼업에 달린 일이 아니라,
인연에 달린 일이고, 인연의 영역에 속한 일이고, 인연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잘 관찰해보면
 
삶은 숙명론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중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은 신구의 삼업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삼업은 중중무진법계연기라고 할 수 있는,
삼라만상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조건들 중 일부분을 형성하는 조건이 된다.
 
그럼으로 중생은 욕심을 낼 수는 있다. 욕심을 내서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신구의 삼업으로 노력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연기한다 함은 모든 것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드라망이라 하며 일즉다 다즉일이라 한다.
어떤 하나의 일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사과 한알이 발생되기 위해서는 태양도 흙도 물도 바람도 양분도 필요한데, 이 말인 즉슨 결국 사과 한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관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공양게를 읽을 때 이 게송을 외우지 않던가. 
한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담겨있고...
 
불교 교리적으로 자아라 할만한 실체는 없지만,
그래도 중생 입장에서 서술해보자면
나라고 하는건 부모님이 있어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성장하고 나이먹어서 이 육신과 정신을 형성하게 된 조건을 살펴보면 온 세상 전체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교육받지 않았는가? 그렇게 초중고시절 교육받는 동안 국방의 의무를 지는 병사들이 삼팔선 보초를 서주었기에 사회에서 안전하게 생활하지 않았던가? 지구상에 혼자서만 있었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국영수사과 과목은 커녕 기본적 언어 습득조차 어려웠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식사는 어찌 해결할 것인가? 지구상 유통구조를 보라. 세계촌시대가 되면서 집안의 가구들, 옷가지들을 보면 결국 온 세계에서 각각 생산된 원자재들을 결합하여 옷을 만들고 가구를 만듦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필자의 부모님은 대학교 CC이다. 그 대학교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또 전 우주적인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학은 국가에서 재정지원금을 받고, 사학재단 혜택도 받는다. 그 대학이 있기 위해선 대학에 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그 대학에 가는 사람들은 전국에서 몰려든다. 그 대학에서 가르키는 학문은 전 세계에서 비롯된것이다.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불어는 프랑스에서. 등등등... 결국 삼라만상은 사실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사물과 개체가 아닌 모두가 상호간에,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 모두가 상호간에 도움을 주고 영향을 주는 관계라는 것이다. 즉 삼라만상은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요 개체가 아니라.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더 신선하고 재밌다. 양자역학은 필자가 잘 몰라서 예기는 잘 못하겠다만, 이 예기를 본 적이 있다. 어느 한 부분에서 파동이 울리면 우주 저 멀리서도 동시에 파동이 울린다고 했던가? 찾아보길 바란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인 것이다. 
 
해서 이 예기가 어찌 나왔던가.
맞다.
 
결국 그래서 세상일이란 어떤 일이든 간에 우주 전체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연관을 하자면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법계 전체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헤아리자면 법계 전체이니, 헤아릴 수 없는 조건들에 의존하여 하나의 사건이 발생됨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연기하는 현상에 있어서, 물론 중생 역시 조건을 지을 수 있다.
신구의 삼업으로.
 
그래서 삶은 숙명론은 아니다.
그러나 사건의 발생양상 즉 결과는 중생의 뜻이 아닌 중중무진법계연기적으로 조성된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
현상의 변화란 중생의 욕심의 영역이 아니라 인연의 영역인 것이다.
 
(그리고 더 엄밀하게는 위에서 제법무아에 대하여 말했듯, 연기법의 특성이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고 중도이기에,
연기하는 현상 속에는 자아라 할 만한 실체는 없다. 그럼으로 더더구나 '나'의 일이란 없으며 이치적으로 따져보면
결국 모든 사건 현상은 인연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는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뭐 상관없다. 깨달아서 불성에서 우러나오는 행을 하던, 깨닫지 못해서 무명에서 우러나오는 행을 하던. 어쨌든 그 행 역시 세상을 구성하는 조건의 일부분이 된다. 해서 불교는 숙명론은 아닌 것이다. 노력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닫기 위해서는 더더욱이 중생이 계정혜 삼학도를 닦는다는 조건과 신해행증 중 신해행의 조건을 조성해주는 것 그리고 듣고 내 삶에 비추어보고 법문대로 삶을 닦아나가는 문사수란 조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크게 요구되고 말이다.)
 
해서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채널을 운영하시는 법상스님은
 
불교가 숙명론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다만 마음은 내고, 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되,
그 결과는 나의 영역이 아닌 인연의 영역임으로
그 결과는 법계에 맡기라고 가르쳐주신다.
 
삼국지에서는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나온다. 같은 뜻이리라.

 

 

 

<참고 도서>

생각이 길이다 - 용타(스님) 지음 / 민족사

붓다브레인 - 릭 헨슨 지음 / 불광출판사

성난 물소 놓아주기 - 아잔 브라흐마 스님 지음 / 각산 감수, 김훈 번역 / 공감의기쁨 (절판된 책)

아바타라 안심이다 - 월호스님 지음 / 마음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