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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길과 중생의 길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11. 13:22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탐심과 진심)으로 관여하면 괴로워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라 할 수 있는 실체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럼 그런 현상은 무엇인가?

일체유위법 모두가 그런 현상이다.

그런 현상을 연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즉 정견이다.

그런 현상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사견이다.

하여 정견이란

그런 현상 일체 모든 것의 변화는

첫째, 인연의 영역이고 인연에 달린 일이지 있지도 않은 실체적이고 관념적인 '나'의 일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연기하는 현상작용을 구분짓고 분별해서는 나 너 선 악 우월 열등 등의 이름이나 개념을 붙이지 않고 조건들 서로 서로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서 연결되 있으며, 연결되어 있음에 직간접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연결이 안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즉 실상은 중중무진연기이자 일즉다 다즉일이고 인드라망으로서 법정스님의 책 제목과 같이 하나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하나를 위하는 모습이고 둘이 아닌 한생명이며 연기하는 현상에는 강과 바다의 구분선이 사실 없고 씨앗과 새싹의 경계가 없듯 연기하는 모든 현상들 간에는 구분선이나 경계가 실상 없고 모두 하나로 연결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즉 불이법을 아는 것이다.)

셋째, 첫째와 둘째의 지혜를 적용하여 나의 일이 아님을 알고, 현상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 (즉 자신과 타자와 사물에 대하여 고정불변하거나 독립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언어로 이루어진 개념은 항상성이란 성질을 가지고있다. 이 항상성은 법계의 실상인 연기법과 상반되는 사견이다. 일체유위법에는 항상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그동안은 자신과 타인과 사물이라고 생각해왔던 세상의 경계들을 바라보면서, 그 경계들이 연기하는 현상이고, 연기하는 현상에는 나라 할 실체는 없으며 연기하는 현상에는 미운 놈이나 고운 놈이라 할 실체도 없음을 알고, 그 모든 연기하는 현상은 인연의 영역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그 연기하는 현상은 나의 일이 아님을 알고 상관하지 않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서는 계를 지키며 정을 닦는다. 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고자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 즉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해 나간다. 하여 육바라밀 팔정도 삼십칠조도품 염불 참선 독경 주력 절 예배 효도 봉사등을 실천하고 실행해 나아가며 복혜를 함께 닦아나간다. 단 이 수행의 과정에서 자리이타적으로서 필요하다면 적절히 방편으로 지범개차한다. 때로는 방편으로서 고소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방편으로 화를 낼 수도 있되, 이는 삼독심이 아닌 보리심으로서 자리이타 자각각타의 보살행으로서 행해야 한다. 이 길은 보살도이며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고 자리이타와 자각각타의 길이고 불국토를 건설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길과 대척점에 있는, 이 길과 반대방향의 길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말해볼까 한다. 범부중생은 이 같은 길을 걷지 않고, 이 길과 대척점에 서있는 실체적 관념 즉 실체시로 세상을 바라보며 탐내고 성내며 경계를 실체시하고 관념적으로 바라보고 생각(=모두가 언어와 형상으로 이루어진것이 생각이다. 고로 생각이 곧 실체시이며 생각이 곧 사견이고 하여 생각이 곧 번뇌다.)을 많이 하며, 경계를 실체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여기고 생각하고 집착하고(실체적인 것으로 여기는게 곧 생각이오 이는 다른말로 집착이라 한다. 생각이 곧 집착이고 실체시이고 이것이 곧 번뇌인 것이다.) 그렇게 집착해서 즐거운 느낌을 주는것은 취하려하고 탐내고 괴로운 느낌을 주는것은 싫어해서 없애려하거나 피하려하는 등 끊임 없이 육근과 육경이란 이 12처를 무명으로 어리석음으로 실체시하며 바라보면서 관여한다. 그렇게 취하려하고 없애거나 도망치려하는 '관여'를 행하면 그 관여하는 어리석음에서 기인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또 다시 받게된다. (더불어 경계를 취하거나 피하려고 관여하지만 경계는 인연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인연의 일인지라 중생의 자아관념에서 기인한 욕심과는 무관하게 인연 따라서 경계는 변화하기 때문에 중생은 세상일이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임을 경험으로 알게되며,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과정 속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늙기싫은데 늙게되고 병들기 싫은데 병들게 되고 죽기 싫은데 죽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리고 만나기싫은 원수를 만나고 영원히 보고싶은 가족등의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게되고 가지고싶은걸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고 편안하고 싶은데 끊임없이 산란하게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 그리고 허기지거나 벌레에 물려 간지럽거나 다치거나 병에 들어 발생하는 등의 육신의 고통을 마주하게 되면서 중생은 괴로워 한다.) 그러나 그 과보가 스스로가 지은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발생된 것임을 몰라서 다시금 그 괴롭거나 즐거운 과보를 실체적인 것으로 집착하여 다시금 또 피하려하거나 없애려하거나 취하려 하는 등 경계에 관여하는 업을 짓는다. 경계가 인연의 영역임을 모르고 자신이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여서 자신의 일이라 여기고 관여를 하며 업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그러한 관여, 그러한 행위에 대한 업을 받게 된다. 그렇게 고락을 반복한다. 이것이 어리석은 범부 중생의 길이고 윤회이다.

하여 수행자는 마주하는 일체의 경계 현상을 위에서 말한 첫째 ~ 셋째의 내용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대하는 {'나'의 일이 아니고 아바타의 일이고 인연의 영역에 속한 일이고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일임을 알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집착(=생각=번뇌)을 계속해서 비우고 (인연에 맡기고), 비우고 (관여하지 않으며) 또 비워내는 (내버려두는) 길을 걸어가며, 더불어 단지 갓 태어나서 엄마란 단어조차도 모르는 간난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듯이 단지 분별없이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림하고 관찰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수행자는 쾌락과 고행을 떠나 중도의 길을 나아가며, 더불어 하심하고 일심하고 무심하고 발심할 수 있게끔 계정혜 삼학과 육바라밀을 닦아나가고, 경전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등 정정진하고 정진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리라.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혹시나 해서 내용을 덧붙이겠다. 공을 안다는 것은 연기법을 아는 것이다. 연기법을 아는 것이 곧 공을 아는 것인 것이다. 왜냐하면 공, 무아, 무상, 중도는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수행자는 연기법을 알아서 연기적으로서 금강경에 나오는 단어인 '무실무허'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하며 팔부중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서 수행자는 색즉시공도 이해하지만 공즉시색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수행자는 연기법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안다는 것은 곧 중도를 아는것이고 삼법인과 제법공상을 똑바로 아는 것이다. 똑바로 알아야 아무것도 없다는 관념인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공이라는 것은 있다 없다를 떠나있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공이라 하기 때문이다. 연기법이 곧 공인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연기 -> 무자성 -> 공 이다.) 인연생기하기 때문에 현상이 있고 작용이 있다. 그 현상 작용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변화하는 현상과 작용은 있다. 그렇기에 없는 것도 아니다. 이 현상 작용에 실체는 없지만, 실체가 없다 하여 현상조차 없는것은 아닌 것이다. 물질은 연기하기에 실체가 없어서 자성이 없는 것이고 공하지만, 그러한 공은 물질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라 이름 붙이고 색이라 이름 붙이는 현상으로서 나타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것이다. 그리고 수상행식도 역부여시하다. 그래서 색불이공 공불이색이기도 하다. 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불자는 이 같은 연기법을 잘 공부하여서 연기즉공이고 연기즉중도이며 연기즉무아임을 알아서 (공과 무아와 중도가 표현만이 다를 뿐 모두가 연기법을 설명하는, 연기와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들임을 알아서) 무실무허의 뜻을 연기적으로서 이해하여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리라.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