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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 (업과 과제의 분리)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8. 17:12

업과 과제의 분리

상대가 뭘하든 살도음망으로 내게 피해주는게 아니면. 즉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한 피해를 주는게 아니면.

상대는 상대의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법적인 선을 넘는 행위에 대해선 신고를 하고 고소를 하면 된다. 그러나 범법이 아닌 단순한 방해나 욕설정도는 법적으론 어찌할 수 없다.

이는 어찌해야할까.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내버려두는거다.
상관하지 않는거다.
그건 상대의 일이다.
그건 상대의 업이다.

내 일이 아니다.
내 업이 아니다.

더 정확히는 그건 꿈과같은 일체유위법의 일이고,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일이다.

왜냐하면 내 심신을 비롯한 연기하는 일체 현상은 사실 분리할 수 없는 상호의존성을 맺고있는 하나의 현상이고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자신이라 생각했던 심신에 일어나는 일도, 육경인 색성향미촉법이란 외부경계에 일어나는 일도 실상 나의 일도 상대의 일도 아닌 연기의 일이다.

왜냐하면 연기하는 현상에는 나라 이름붙일만한 실체도, 상대 즉 길동이 개똥이라 이름붙일만한 실체도 없기 때문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실무허이다. 그래서 팔부중도가 성립되고 반야심경에서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가르침이 설해지는 것이며, 불일불이가 성립되는 것이다. 실상은 연기법이며 불이법이다. 깨달은 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자신과 타자는 둘이 아니며 각각이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으로서 존재하는 개별적인 실체들이라고 여겼던 삼라만상 역시 둘이 아닌 하나이며, 한생명이고 인드라망이고 중중무진법계연기인 것이다.)(그리고 이와 같은 연기법과 공성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불성이고 진여인듯 하다. 단 이 진여 불성 본래면목과 유위법간의 정의에 대한 부분은 필자가 아직 지식적으로조차 이해를 완전히 하지 못한 부분이기에 앞으로 더 공부를 하고 수행도 해봐야 지식적으로나마라도 이해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되는 부분이다. 참고로 진정으로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알고 있다. 이를 위해 불자 사부대중은 염불 독경 주력 참선 사마타 위빠사나 팔정도 계정혜 삼학 육바라밀 등등의 수행을 하는 것이고 말이다.)

고로 내 일도 아니고 내 영역도 아니다.

외부경계뿐만이 아니라 내 심신에서 일어나는 일 조차도 실상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일이고 인연생기의 영역이다.(고로 육신이 늙고 병들고 죽는것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으로나마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하기는 하다. 신구의 삼업을 짓는 것이다. 이 영역이 존재하기에 불교에서의 자력으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진여 불성 본래면목이 있고 일체유위법은 연기하는 것이며 중생은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기에 일체중생 모두가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리라.)  

고로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단 법적 제제가 가능한 선의 일은 법에게 처벌을 맡기면 되고

그 수준이 아닌 상대의 행동은 하지말라고 말하고, 그 행동을 하니 내가 힘들다고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고, 법이 아닌 윤리도덕이나 강제성은 없는 집단의 규범으로 부탁이나 요청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건 없다. 그렇다고 범죄를 저질러선 안되기도 하다. 불자가 그래선 안되리라. 법적 처벌도 처벌이지만 자신이 짓는 악업에 의해 받게될 과보를 생각해보면 악업은 지어선 안된다. 그것이 악한 행위를 하는 날 괴롭히는 상대까지도 진정으로 위하고자 하는 자리이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행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고로 단순한 방해정도는,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내버려두는거다.
상관하지 않는거다.

그럼 된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짜피 중생들은 각자의 업식대로 살게 되있으니,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첫째. 내 마음을 바꾸는 것. 내가 깨닫는 것이다.
둘째. 물질적인 도움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본질적으로 상대방의 업식이 바뀔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법보시를 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교육은 곰으로 비유하자면 새끼곰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것이 아닌 물고기 잡는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재보시는 법보시를 중생이 받아들이는 조건이 될 순 있어도 백날 재보시만 해서 상대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대로이지 않겠는가 생각이 든다.

필자는 길을 오가다 쓰레기가 보이면 사람들이 자칫 미끄러져 넘어질까 걱정되서 줍곤 했는데, 백날 그리해봤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고 업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써본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다칠만한 과보를 받을 씨앗을 심은 사람도
그 마음과 견해와 업식이 변하지 않고서는 악업을 짓는 행위와, 받아야 되는 과보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리라. (부처님께서는 하늘 위로 깊은 물속으로 산속으로 숨어도 지어놓은 과보는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이 더 든다.

필자가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마음이 바뀔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고로 앞으로도 쓰레기는 종종 주워야겠다 생각된다.

그리고, 겨울을 제외한 계절엔 쫀득이나 과자봉지같은 쓰레기속에 개미들이 꼬인다. 개미들이 그 쓰레기속 끈적이는 액체에 달라붙어 하루 이틀 삼일 발버둥치다 죽는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아는가? 그 개미들이 수없이 붙은 쓰레기를 지나가는 행인이 밟고가면 개미들이 압사하고, 그걸 환경미화원분이 주워 버리면 그 끈적이는데 붙어있는 상태로 개미들이 아사하거나 쓰레기를 소각할때 불에 타서 죽는다.

고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주변에 어린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개미를 위해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도록 교육을 부탁드린다.

그리고 오늘 필자가 한가지 더 통찰된 바가 있다.

금강경에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라는 사구게가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세계가 이 사구게처럼 꿈과같고 연기 안개 물거품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모든것이 서로서로 연결되있는 것이 실상일지라도

단면적으로 볼 때 어떠한 현상 하나가 발생되려면 무작위로 우연으로 발생되는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발생할 적합한 인연 조건들이 형성되어야 발생된다.

오늘 필자는 이를 느꼈다. 물론 어떤 현상 하나가 발생하기까지는 모든것이 직간접적인 조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중중무진법계연기이고 인드라망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업이 인이고 시공간적 조건이 연이라 하나,

이 연에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다시 세분화될 수 있는 듯 하다.(필자의 추측이다.)

필자가 금일 자전거를 타고가다가 실수로 체인부분을 발로 건드렸는데, 체인이 꼬였다.

그냥 좀 페달을 밟다보면 괜찮아지겠거니 생각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서 내려서 십여분 연구를 한 끝에 체인끝부분이 돌아가는 선을 이탈해서 꼬였음을 발견했고, 이를 제자리에 들어서 맞춰주니 비로서 자전거가 잘 굴러갔다.

이 일로 어떤 현상이 발생되는 것은 발생될 적합한 인연이 필요함을 알게되었다.

유위의 세간은 꿈과같은 세상이며, 법계무진중중연기가 나의 실상이라 할지라도,

이 꿈과같은 세상에는 인연생기법, 인과법이란 나름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 법신불의 가르침을 통해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