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장의 원융적 해석과 마장의 타개법
부제 : 실체시하지 않아서 바라거나 구하거나 피하거나 없애려 하는 마음 없이 수행하라. (즉 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음을 알아서 환영에 집착하고 관여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고 내버려둔채 단지 알아차린 뒤 내 수행으로 돌아와라.)
원융은 공가중 삼제가 함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보자면 좋고 나쁘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함께 오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이런 원융의 측면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원융이 발생되는것은 근본적으로 중생의 분별망상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 든 통찰이다. 좋고 나쁘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라는 것은 언어로 구성된 표현이다. 실재로는 이 표현 개념 명칭에 해당하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고 꿈같고 환영같은 현상만이 존재한다. 무명중생들은 연기법을 몰라서 이런 현상을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런 현상을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해서 좋고 나쁘고를 분별한다. 해서 좋은걸 취하려하고 나쁜걸 피하려하고 없애려한다. 그렇게 분별하기 때문에 한쪽 변을 세우면 다른 한쪽 변도 자연스레 성립되게 되는 듯 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현상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 좋게 볼 수도 있지만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원융이 성립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같은 원융의 이치를 불경에서는 공덕천과 흑암천의 이야기로서 풀어놓은 것이리라. 해서 이 같은 이치로서 원융이 성립되며, 이 같은 이치 때문에 중생이 락수(즐거운 느낌)에 갈애를 가지고 그 갈애를 가지는 현상을 실체시하여 취하려할 때(즉 집착할 때) 그로 인해서 유 생 노병사 우비고뇌라는 12연기의 유전문이 이어지며 윤회하게 되는 것 같다. 하여 부처님 께서는 이 같은 이 같은 원융의 이치로 인하여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산은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산이오 서쪽에서 바라보면 동산이다. 산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동산이라 해도 상관없고 서산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것들은 다 가명일 뿐이다. 그러나 실상은 애초에 동산이라 할 실체도 서산이라 할 실체도 없고, 이름 지을 이름이 없는 연기하는 현상만이 있을 뿐이고, 그 현상은 연기한 것이기에 애초에 본래 없는 것이기도 하며, 현재 또한 이름 지을 이름이 없기 때문에 포그스크린과 같은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헛깨비와 같고 신기루와 같은 것일 따름이다. 산만 그런 것이 아닌 삼라만상이 마찬가지다. 지금 한반도 동쪽 바다를 두고 동해냐 일본해냐의 표기법을 두고 갈등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동해로 표기하는게 맞긴 하지만, 그 실상을 보자면 결국 앞서 산에 대하여 풀이해본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일 것이다.)
해서 기도수행 중 마장이란 원융의 이치로 인하여 좋은 것이란 본래 있지도 않고 현재에도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시하여 취하려 할 때 반대급부인 극단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통찰이 되었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다는 공간적 연기이자 상의성의 이치이며 원융의 이치일 것이다.
고로 수행자는 중생이 언어로서 이름짓는 양변이 모두 중관학적으로는 희론이며, 그 실상은 연기 무자성 공인줄 알고,
양변을 몽환포영로전으로 즉 포그스크린과 같이 실체없고 모양없는 환영으로 봄과 동시에
양변, 양 극단, 이분법적 실체시, 분별을 모두 떠나서 무실무허한 중도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수행정진하여서 조견오온개공을 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해서 현실적으로 예를 들자면 기도시 공덕이나 복덕에도 집착(실체시해서 취하려함)하지 말고, 구하려 하는 마음과 피하고 없애려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체 모든 인연생기하는 유위법에도 그리고 생사에서 연기한 열반이나 번뇌에서 연기한 보리에도 집착함이 없이 제법이 공한 모습을 새기며 취할 것이 없음을 알고선
바라고 구하고 피하고 없앨 실체가 없고 포그스크린과 같은 조건따라 일어난 실체 없는 꿈같고 환영같고 안개같고 무지개같고 신기루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고 번개같은 현상이자 작용이 있을 뿐임을 알아서
바라는 바 없이 구하는 바 피하고자 하고 없애고자 하는 것도 없이 그리고 자아,나,너,선,악 등의 실체적 관념 없이
그저 마하반야바라밀의 관점에서 기도를 해야 될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결론은 부제와 같다.
실체시하지 않아서 바라거나 구하거나 피하거나 없애려 하는 마음 없이 수행하라. (즉 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음을 알아서 환영에 집착하고 관여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고 내버려둔채 단지 알아차린 뒤 내 수행으로 돌아와라.)
라는 것이 결론이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 품지 말라고 한 바라거나 구하거나 피하려하거나 없애려하는 의도는 모두 실체시를 하기 때문에 생긴다.
고로 근원적으론 실체시를 하지 말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할 것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니 약견제상비상 할것이며
색이나 음성이란 실체적 관념(이름, 개념 - 참고로 말하자면 언어는 항상성을 갖는다. 이는 연기의 특성인 삼법인과 상반되는 실재하지 않는 특성이다. 즉 언어가 지칭하는 것은 현실에는 없는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자 언어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는 수단이란 것이다. 즉 다시말해서 진리적 실상은 언어를 떠나있다는 것이다.)을 통해 부처님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할것이며
조견오온개공 해야 할 것이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실체적인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오온 12처 18계란 각각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견임을 알고
언어 분별 이름 개념등의 희론으로서 세상을 보는 착각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실상은 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기에 이름 붙일 이름이 없음을 알고
또한 중생들이 이름붙여 부르는 현상은 실상 이름 붙일 것이 없음을 알고
더불어 그 현상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에 (현재도 이름붙일 이름이 없지만) 본래 없는 것임을 알고
주함 없이 집착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살아가는 실체(자아) 또한 없지만 말이다.
해서 일체유위법을 꿈과 같고 포그스크린과 같은 환영과 같이 실체가 없고 그저 나타나서 보이고 들리는 등 육근으로 인식되는 현상만이 있다고 보는 것이 수행적으로 바른 관점일 것이다. {포그스크린은 보이는 현상만 있고, 일체유위법은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도 느껴지고 감촉도 있고 인식도 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 두가지 모두 실체가 없는 환영이자 꿈과 같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現象)이란 점은 동일하다. 참고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상이란 단어는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연기하는 현상엔 자아라 할 실체가 없음으로, 그 연기하는 현상은 나의 일이 아닌 인연의 일이고 인연의 영역임을 알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며
어떤 경계가 일어나든 다만 거기에 이름붙이지 않고(=실체시하지 않고=의미부여하지 않고) 다만 그저 알아차림하고 바라보기만 하며
그렇게 경계에 일시적으로 주의가 갔다면 알아차린 뒤 다시 참선자는 화두로 수식관을 하는 자는 호흡으로 주의를 돌리고,
그렇게 (경계에 연연해하거나 개의치 않고) 분별없이 단지 알아차린 뒤 다시 수행을 재개해서
그렇게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게 바른 정진(정정진)을 해나가면 될 일이다.
중도적으로서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자세를 가진 수행자는 언젠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며 사홍서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m/5547
- 위 글(거짓세계)에서 주목할 부분 : 그럼으로 수행자는 실체 없는 현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진여 불성이 존재함으로(더 정확히는 진여 불성에서 무명이 연기한 것이고 그 무명에서 현상이 연기한 것임으로 - 이 부분 혹 필자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면 댓글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타인이나 다른생명을 대할 때는 불성종자로, 부처님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로, 여래장으로, 여래의 태아를 품고 있는 이로서 보고 무엇보다 근원자리(진여불성)에서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아서 일체중생을 법화경의 상불경보살님과 같이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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