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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6년간 기도를 어리석음과 욕심으로 했음을 깨달았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21. 14:50

금강경 반야심경 중관을 공부하고 사유하다보니 깨닫게 되었다.
해서 그게 다 '공덕'이란 단어를 실체시 하여서 집착한 것이었음을 알고서
이것 저것 여러가지 기도를 하던걸 그만두고,
 
오늘 그간의 기도와는 달리 관음정근과 반야심경&금강경 독송 이렇게 두가지를 위주로 기도를 진행하였다.
 
결국 불자(佛子)의 기도 수행 정진은 모두 탐진치를 없애고 비우는 과정일 것이며
어리석음은 곧 연기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실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체시(相), 실체적인 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 것임으로 이 실체시, 아상, 이기심, 자존심, 자만심, 비교 분별을 비우는 과정일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애초에 비교하고 분별할만한 실체도, 이렇다 저렇다 이름 붙일 만한 실체도, 나라 할 만한 실체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만한 실체도, 원수라 할 만한 실체도,  내 것이라 할 만한 실체도, 붙잡을 만한(집착할 만한)실체도, 살거나 머무를 만한(住) 실체도 없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서 금강경에서는 무유고하 즉 높고 낮음이 없다고도 하지 않던가.)
이는 다시 말하자면 곧 생각을 비워가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란 곧 언어 즉 이름과 개념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가 지니는 성질은 연기하는 현상계의 삼법인이라는 특성과 상반되는 항상성(고정불변함)이기 때문에 생각은 모두가 사실상 정견과는 상반되는 사견이라 할 수 있고, 착각이라 할 수 있고, 번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번뇌' 이고, '생각=어리석음' 인 것이다.)
 
이 같은 탐진치를 버려가는 수행의 과정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라고 가르쳐 주시며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리라.
 
 
결론은 공덕이라 할 만한 실체도 없음을 이해하고,
언어라는 것은 항상성이란 특성, 고정불변함이란 특성, 실체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기에, 언어로 사유하는 것은 결국 죄다 이분법적인 사유가 될 수 밖에 없고, 나누고 구분짓고 분별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고, 언어로 구성된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되면 결국 이것과 저것의 양변 즉 양 극단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양 변이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양 변이 모두 연기한 것이기에 무자성하며 무자성이기에 공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며, 또한 애초에 그 양 변이 근본적으로는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에, 애초에 그 양변이라 이름붙일 실체가 없는 그 허망한 환영, 그 허망한 현상조차도 애초에 본래 없는 것임을 가르쳐주셔서 제자들이 양 극단을 실체시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끔 해주시는(즉 집착에서 벗어나게끔 해주시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해서 이 같은 양극단(실체시,집착)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실천하여 연기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서,
실상은 무실무허이며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며 팔부중도임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를 새겨보며 필자는 수행의 본질을 상기하였다.
 
수행의 본질은 탐진치를 버리고 비우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실체시를, 상을 비우고 버리는 것이다.
 
하여 필자는 탐진치를 없애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간 해오던 기도의 방식을 바꾸었다.
 
결국 언어 문자로 표현된 모든 것은 실체적인 성질을 가짐으로 가명(假名)임을 새기고, 실상은 연기하기에 실체는 없고 현상만이 있음을 새기고서는(즉 실상은 이와 같기에 비유하자면 포그스크린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2694344?sid=101 과 같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헛깨비와 같고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 안개 그림자연극이자 이슬 번개같은 것임을 새기고서는 - 금강경 사구게의 이야기.)
 
이걸 하면 어느 정도의 공덕이 있다고 하는 그런 여러 종류의 경, 다라니, 진언 등등을 이것 저것 외우는 것을 그만두고,
 
오늘 딱 관음정근과 금강경(그리고 반야심경) 이 두가지를 위주로 기도를 진행한 것이다.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기도 방식을 지혜롭게 잘 바꾼 것 같다.
 
단 현재로서는 이 두가지. 관음정근과 금강경(그리고 반야심경)독송 중 한가지마저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필자는 반야경 계통의 공부를 하고 중관을 공부하고 사유하면서 결국 불자라면 
 
초보불자라면 염불 진언 등 쉬운 것부터 기도를 시작하고, 가피담 영험담을 통해 불교에 호감을 갖는 것도 매우매우 좋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불교의 본질인 무상정등정각의 성취, 성불을 생각해 봤을 때
 
결국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불자가 나아가야 할 길은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길이며
부처님과 같은 지견을 성취하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생각에서 필자는 일반적으로 불자님들이 금강경, 반야심경을 비롯해서 여러 경전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생마다 조건이 수만가지임으로 부처님께서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해주신 것일 터이니, 필자는 바로 앞서 쓴 문장에서 '모든 불자님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하여 어쨌든, 필자는 이 같은 생각으로 기도와 수행의 본질인 탐진치를 없애는 것을 사유하고선
첫째로 지난 6년간 치심과 탐심으로 기도를 해왔음을 깨달았고,
두번째로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다.
 
이렇게 필자가 기도의 방식을 바꾸게 된 사연(事緣)을 마친다.
 
 
마하반야바라밀

 

 
 

ps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 사구게를

일체유위법 포그스크린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고,

모든유위법 허망한환영 찰나간소멸 이렇게보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