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을 알면
감각기관인 육근으로 인식되는 모든 존재와 사물들은 실체가 없이 그저 일시적으로 나타난 환영임을 알게된다.
문제는 그 환영들이 너무나 리얼하다는 것이다.
2014년이었던가 허공에 영상을 띄우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이 기술은 시각적으론 현실과 같을 수 있고 또 청각적인 자극도 비슷하게 줄 수 있겠지만 향미촉법까진 구현하지 못한 기술이다.
그래서 이 허공 영상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이 환영일 뿐임을 알 수 있지만
현실세계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금강경을 공부해보면 이 현실세계 역시 실재로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재로 존재한다면 실재로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어야된다. 언어로 만들어진 단어는 고정불변한 속성 즉 항상성을 가지는데, 이 단어 이름 개념에 해당되는 대상은 사실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된 현상이고 작용인지라 그 현상이나 작용에는 고정불변한 속성의 실체는 존재치 않는다. 그와같은 실체가 존재치 않기에 이름을 붙이는 대상은 사실상 대상과 대상아닌것과의 구분선이 없다. 인간만 해도 사실상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동식물 생명체들과 우주자연이란 조건에 의존하여 생노병사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살펴보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공기 흙 물 햇빛을 비롯 인간의 심신은 사실 이 세상 삼라만상에 의존하여 형성되고 변화하는 (즉 연결되있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육신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사실 맞지 않는 표현이다. 육신은 생명활동이 다하기 전에도 이미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인간과 나무는 공기로 연결되어 있고 그 공기는 인간을 조건으로 의존해 이산화탄소로 변화하고 그 이산화탄소는 나무를 조건으로 의존하여 산소로 변화하게 된다. 물은 조건에 따라서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기도 하고 구름이 되기도 하고 눈이되기도 하고 우유가 되기도 하고 피가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며 오줌이나 똥을 구성하는 성분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있고 삼라만상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앞서 말했듯 연기(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 현상에는 실체가 없으며 연기한 현상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구분되있고 각각이 각기 존재하는 각각의 분리된 개체로 보이지만 그 실상은 구분되있지 않고 분리되있지 않은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한가지 더 말하자면 이 현상은 근원적으로는 무명이란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무명이 소멸하면 현상은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무명이 홀연히 있기 이전에는 현상은 본래 없던 것이라는 것이다.) 하여 그 현상이나 작용에는 고정불변한 속성의 실체는 존재치 않으며, 그와 같은 실체가 존재치 않기에 실상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허공에 띄어진 영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다름 없고 그림자연극의 그림자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다름없고 꿈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같은 꿈같고 환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제법무아, 무자성 공) 이슬같고 번개같은(제행무상) 현실에서 이름을 붙이는 대상의 실상은 사실 그 이름 붙인 대상과 그 대상이 아닌 것과의 구분선도 없으며 그 자체적인 고정불변한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은 환영과 같은 속성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이 세계는 리얼하지만 실상은 눈귀코혀몸의식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오온 12처 18계 - 즉 유위법)이 환영으로 이루어진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계는 거짓된 가상현실이며 시뮬레이션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당신이 반드시 위 내용과 동시에 유의하고 알아야 할 것)일곱가지가 있다.
첫째. 중생이 무상정등정각을 얻기 전까지는 이런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 세계는 이름을 붙일만한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꿈같고 환상같은 속성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무실무허라고 한다.) 그럼으로 실체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에 빠지는것은 사견 즉 잘못된 견해이며.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바른 견해이다.
셋째. 그리고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이 세계가 환영세계라 할지라도 온갖 물리적인 고통은 실재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모기에 물리면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지는 것부터 칼에 찔리면 아픈 감각까지. 코로나에 걸리면 괴롭고 발에 가시가 박히면 아픈 통증까지. 이런 감각은 실재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이런 감각적 고통은 깨달아도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과 같이 깨달은 분들은 2차적인 고통이 없다. 즉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다. 즉 다시말해서 미워함 증오함 두려움 불안 시기심 질투심 등의 정신적인 고통은 없다는 것이다.)
넷째.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존재하는 것이 중생들이 사는 세계의 실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인간세상 외에도 다섯가지의 세계가 있다. 이 중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라 불리는 세계의 육신을 받는다면 인간세계보다 느끼게되는 고통의 량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지옥 - 아귀 - 축생의 순으로 고통이 작아진다.) 해서 이 세계에 태어나면 고통이 커서 깨닫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인간 그리고 지옥과 아귀와 축생세계 이외에도 아수라세계와 천상세계가 있는데 이 두곳 역시도 깨달음을 얻기위한 공부를 하기가 힘든 세계이며, 이 두 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인간보다 오래살긴 하더라도 그 목슴은 유한하기 때문에 죽음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되며, 이 두 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이 죽으면 또한 각자의 업에 따라서 다시금 윤회하여 여러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천상의 경우 즐거움이 너무 커서 그곳에 태어나게 되면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는 곳으로 필자는 알고있다. 아수라도의 경우는 필자도 잘 모르지만 하여튼 천상 아수라 두곳 역시 깨닫기 위해 수행 공부를 하기 위한 환경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으며 육도 중 인간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천상세계보다 괴로움은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도 중 유일하게 해탈 열반 마하반야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는 공부가 가능한 곳은 인간세계뿐이라는 것이 필자가 해주고싶은 이야기이다.)
여섯째. 이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있는 세계는 꿈과 같지만 꿈과는 다른 점이 있다. 실체가 없다는 점에선 꿈과 같지만, 꿈은 무작위로 변화한다고 한다면 이 유위법 세계는 일정한 법칙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 꿈과는 다른 점이다. 그 일정한 법칙이란 인과법 인연법 연기법이다. 이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의미인지는 인터넷에 인과법, 인연법, 연기법이란 키워드를 입력해서 찾아보길 바란다. 이 법칙을 알아야 괴롭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도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일곱째. 깨달은 자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꿈같고 환상같다는 거지 중생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이 세상은 꿈이나 환상 물거품 그림자연극이 아니라 그저 현실 그 자체일 따름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나 이 글을 쓴 필자역시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닫지 못했다면 암만 환영이야 꿈이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한들 막상 미워하는 대상을 마주치거나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면 그 순간은 환영이고 꿈이고 나발이고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엄연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치성한 현실이라고 생각이 들 뿐이다. 고로 두가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7-1) 수행과 일상생활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해서 금강경의 사구게 내용과 같이 유위법을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같다고 관하는 것은 수행을 할 때에 있어서는 그리 관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7-2) 그리고 현실 생활을 할때는 분별을 하고 대상에 이름을 붙일 줄 알고 좋고 나쁘고 선과 악과 이익과 손해가 있다고 구분지을 줄 알아야된다는 것이다. 이를 구분짓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반사회적인 사람이 된다.
현실을 살 때는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을 다닐 때 당연히 더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편안하며 윤택할 수 있는 것이다. (단 불교 공부와 수행을 꾸준히 해나간다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는 연기한 것이기에 자성이 없으며 자성이 없기에 공하다는 색즉시공뿐만이 아니라 공즉시색의 이치 즉 실체가 없다 함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고 이름 붙여 구분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는 공(중도)의 모습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면 이를 체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조건에 따라서 공가중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물론 필자는 아직 공가중에 대해 지식적으로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수준이다.) 그러므로 출가자가 될 것이 아니고 재가자로 살 거라면 가족들도 부양해야되고 자신도 먹고 살아야 함으로 현실적으론 법규를 지키고 오계나 십선계를 지키는 선 안에서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부지런히 땀흘려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라. 해서 효도도 하고 가족들 부양도 하고 기부도 보시도 많이 해라. 즉 다시말해서 수행과 일상생활에서의 관점을 구분지어서 일상생활을 할 때는 적절하게 분별을 하고 선악과 이익과 손해를 구분지을 줄 알고, 또한 (비록 실상은 실체가 없는 현상일지언정) 그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구분짓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타에 이익이 되는 방향(자리이타, 자각각타)으로 말이다. (이것이 가명을 활용 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이게 결론이다.
매우매우 중요한 한가지를 빠트려서 추가한다.
여덜째. 자신과 타인과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래가 될 직접적인 원인이자 부처님의 태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불성이 중생의 참된 본래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 진여 본성 본래면목 참나 진아 주인공 등으로 표현되는 불성을 깨닫는것이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을 얻기위해선 반야바라밀다 즉 조견오온개공을 해야된다.) 그럼으로 앞서 이 세계가 환영과 같다는 내용을 봤다 해서 자신 이외의 생명체들을 그저 한낮 게임속의 NPC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타인과 동물들 곤충들 등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생명체들을 불성을 가진 이로. 즉 장차 부처님이 될 이들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금강경의 사구게와 내용이 다른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금강경의 마지막 사구게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다. 그런데 금강경의 첫번째 사구게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이란 구절은 이와 같은 맥락과 의미를 가진 내용이다. 그리고 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이란 구절을 실행함이 원인이 되어서 즉견여래라는 결과를 성취하게된다. (이는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으로 수행자는 실체 없는 현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진여 불성이 존재함으로(더 정확히는 진여 불성에서 무명이 연기한 것이고 그 무명에서 현상이 연기한 것임으로 - 이 부분 필자가 여래장에 대하여 조금 공부한 내용을 풀어본 것인데 혹 필자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면 댓글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타인이나 다른생명을 대할 때는 불성종자로, 부처님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로, 여래장으로, 여래의 태아를 품고 있는 이로서 보고 무엇보다 근원자리(진여불성)에서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아서 일체중생을 법화경의 상불경보살님과 같이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정리하자면 수행자는 무실(색즉시공, 현상이 곧 공함)뿐만 아니라 무허(공즉시색, 공이 곧 현상으로 나타남)까지 알아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며,
이 같은 무실무허한 현실세계를 반야의 지혜로 꽤뚫어 보아서 조견오온개공을 할 때 견성을 즉 진여 불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불이(不二)법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이법이 무엇인지는 다음 기사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8780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는 것을 일러 자성이라 하고, 둘 없는 자성을 일러 실성이라고 한다.
- 육조 혜능 대사 -
(위 기사 내용 중 발췌)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다. 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어서. 환영과 같아서.
(연기하기 때문이다.)
헌데 중생들은 이름붙인다. 나와 너, 선과 악, 좋고 나쁨, 우월 열등, 중흥과 쇠퇴, 부처와 중생, 보리와 번뇌, 생사와 열반..
생각은 온통 이름 개념으로 이뤄져있다. 나 스스로를 관찰해보니 이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이 생각때문에 괴로워 하더라.
이름을 붙이니 양변이 생기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었다.
해서 위 기사에 나온 내용이자 중관학의 가르침과 같이 양변의 이름을 다 지워보았다. 아니 지울 것도 없었다.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음을 관찰해 보면 되는 것이었다. 해서 그래보았다.
그러니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었다.
(그냥 기존에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일어났던 경계를 마주할 때 머리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바라봐 본 것이다. - 이 내용은 이전 필자의 글들에 쓴 것과 마찬가지로 바히야경의 가르침과 연관되는 같은 맥락의 수행인 것 같다. 이 생각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위 기사를 읽고 필자는 자성은 불이중도이며, 그 자성에 이름붙일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 자성은 나의 자성과 너의 자성이 따로 있지 않고 하나의 자성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하여 근원에서는 일체중생 삼라만상이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라만상이나 일체중생이라 함은 하나가 아닌 각각의 대상 여럿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위 기사까지 읽은 후 상의성 즉 상호의존성 즉 공간적 연기의 공식이 매우 중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은 시간적 연기가 실재로 육안으로 관측 가능하니 이걸 기반으로 무아 무자성 공이 성립되는 것이지
공간적 연기는 중생의 번뇌라 할 수 있는 희론 즉 생각 즉 언어 명칭 이름 개념에 대한 상의성이자 동시발생을 설명한 연기공식이기에 이것이 필자는 여태껏,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잘 이해되지도 않았고 은연중에 이것은 시간적 연기보다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생각이 변화했다.
결국 중생이 괴로운 것은 이 희론 즉 생각 때문이었음으로,
양변(이분법적인 개념 즉 언어로 구성된 이름 명칭 개념 즉 희론)을 모두 지워버려서 불이중도의 실상을 바로보게하는 대승의 반야 중관 선의 가르침이 결국 이 공간적연기(=상호의존성=상의성)라는 중생의 번뇌 발생의 이치이자
괴로움과 즐거움이 발생되는 이치이자 삼라만상이 발생하는 이치를 바탕으로 성립된 가르침임이 통찰되었기 때문이다.
위 기사 정말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이다..
불법승 삼보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 불법승.
육조단경을 읽어봐야겠다.
관심이 생겼다.
나무 불법승.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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