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나름대로 지금까지 공부하고 배운 바를 종합해서 해설해본 내용입니다. 해설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1장 법회가 열린 인연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진지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으시고 바루를 가지시고 사위성에 들어가 차례로 밥을 비시었다. 그리고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바루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해설 : 차례로 밥을 걸식하여 공양하신 것(과 더불어 가사와 바루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것)은 계학이고, 자리를 펴고 앉으신 것은 정학이다. 이후 수보리존자의 질문이 없었다면 혜학이 말없이 발생됨이 본래 수순이었을 것이다.
제2장 선현이 법을 청하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바른쪽 어깨에 벗어 메고 바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공경하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잘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깨달은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번뇌의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아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가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니라. 너희는 이제 자세히 들으라. 선남자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깨달은 마음을 이와 같이 머물고 그 번뇌의 마음을 이와 같이 항복받을지니라.”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즐거이 듣기를 원하옵니다.”
해설 : 수보리존자가 자리이타적인 질문을 하였다. 이 질문 덕에 부처님 입멸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중생들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보살이라면 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키며, 어떻게 마음을 머물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제3장 대승의 바른 가르침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번뇌의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니라. 무릇 있는바 모든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기는 것, 태로 생기는 것, 습기로 생기는 것, 화하여 생기는 것, 형상 있는 것, 형상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모두 다 교화하여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라.
이렇게 하여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다 하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해설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보살은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나요? 라는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마음을 내고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모두 다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백점이다.(보살 자격시험 만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거이다. 그리고 이 백점짜리 답안이 왜 답인지에 대한 해설이 뒤에 나온다.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 네가지 상은 결국 아상과 법상에 포함된다. 이는 더 줄이면 실체시라고 할 수 있다. (실체시의 반대말은 연기시이다.) 보살은 실체적인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살자격시험 백점짜리 답안과 같이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연기시가 그 답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조견오온개공은 연기시와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의 순(유전문), 역(환멸문)으로서 무명과 노사 - 무명이 다함과 노사가 다함, 사성제인 고집멸도, 지혜, 얻을 것 이란 단어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단어들 앞에는 '없을 무' 자가 붙어있다. 왜인가. 이 단어들이라 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왜인가? 연기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법칙이 연기법이고 인과법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를 알고, 자신과 타자와 세상을 연기적인 현상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보살은 앞서 예기한 반야심경에 나오는 없을 무자가 붙은 대상들이 모두 자성(실체)이 없고 공하다는 것을 꿰뚫어본다는 것이다. 확연히 안다는 것이다.
{자성이란 자신의 성품을 말한다. 법성이란 법의 성품을 말한다. 이 자신의 성품이란 자신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법성 역시 법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다운 몸이란 무엇인가 하면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연생기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인과 연은 무엇인가. 인은 결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신구의 삼업이 해당된다. 연은 결과를 발생시키는 간접적인 원인이다. 이 연은 중생들의 업력으로 형성된 것이다. 고로 결국 인만이 남는다. 이 인은 신구의 삼업이다. 헌데 구업과 신업은 의업이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 그럼 결국 의업만이 남는다. 이 의업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마음은 모든 법에 근본이 되고 모든 것에 앞선다.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하면 행동 또한 악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한 죄와 고통이 악행을 따르는 것은 마치 수레바퀴에 자국이 따르는 듯하고, 마음으로 착한 생각을 하면 행동 또한 착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한 복과 즐거움이 선행을 따르는 것은 마치 물체에 그림자가 따르듯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화엄경>에서는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을 다 그리네.
오온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면
만들지 않는 것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네.
응당히 알라. 부처와 마음은
그 체성이 모두 끝이 없네.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悉從生)
무법이부조(無法而不造)
여심불역이(如心佛亦爾)
여불중생연(如佛衆生然)
응지불여심(應知佛與心)
체성개무진(體性皆無盡)
이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결국 자아라 할 실체는 없으며 법의 성품 또한 공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같은 현상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의업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업은 무명에서 기인한 것이고, 깨달았다면 그 이후로는 업을 짓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다.(이 부분은 필자가 확실하게 아는 내용은 아닌지라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렇다면 이 의업조차도 무명이란 조건에 의존해 발생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연기법)를 체득하면. 해서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면 열반에 들어가게 되서 윤회가 종식된다고 하는가보다. 이 열반을 https://brunch.co.kr/@advaita/17
여기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들어남이라고 표현해두었다. 전도몽상을(무명을, 어리석음을, 착각을 - 모두 같은 뜻일 것이다.) 벗어나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게 되는데 이 것이 열반이라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번뇌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방법은 아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모두 결국 아상이란 집합에 포함되는 실체적인 관념이라고 필자는 알고있다. 참고로 관념에 집중하는 수행이 사마타이며 실제로 경험 가능한 것인 심신의 감각 느낌 생각 감정등을 관찰하는 수행이 위빠사나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무상과 무아를 체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바라는 것이 없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라는 책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 책은 행복한 숲 이란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 25.1.2.내용 추가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3분의 이 내용은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고, 일체중생을 제도하지만,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위의 한글본 해석은 이렇게 나와있네요.
1.내가 모두 다 교화하여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라.
2. 이렇게 하여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지만
3.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다 하라.
이 해석에 대하여 이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실은 원수가 있습니다. 많이 많이 미웠습니다. 그런데 이들 말고도 살아오면서 만난 원수들이 꽤 됩니다. 사실 지금껏 저는 그들을 줄곧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보기를 꺼려했고, 마주치기 싫어했고,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니깐 제가 그들을 피하려 하게 되며 제 자유가 사라졌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화가 일어나니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었습니다.
해서 오늘 더이상 미워하지 말아보자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같은 생각을 하는 데는 여러 조건이 작용했습니다. 우선 법정스님의 법문이 큰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 법문에서 배운 내용은 행복하려면 간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극락이 되려면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상은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더불어 광덕스님의 불교책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에 나오는 가르침도 큰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배운 큰 가르침은 대립심을 가지고 있다면 기도 성취가 안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립심이란 무엇입니까. 결국 대립한다는건 나와 남을 나누고 아군 적군을 나누고 선악을 나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실상은 연기-무자성-공이고 중도이며 불이법인데 말이죠. 생각해보니 광덕스님의 가르침이 정말 옳은 가르침이더라구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 이 책 정말 좋은 책입니다. 여러분도 꼭 읽어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미움을 더이상 갖지 말아야겠다 생각하게 된 조건은 바로 제 친동생입니다. 저는 제 가족들에게 참 정이 많이 갑니다. 사랑합니다. 제게 부처님은 제 가족들입니다. 저는 이런 가족들이 최속원만하게 성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제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가장 빠르고 가장 좋은 길은 역시 제가 성불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즉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는 것일 것입니다. 해서 저는 오늘 제 친동생을 보면서 빨리 성불해야겠다. 빨리 최속원만하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한 뒤, '깨닫기 위해서 악행이 아니라면 뭐든 못하겠는가.' 라는 생각에서. '그래. 용서하자. 더이상 미워하지 말자. 대립심 가지지 말자.' 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미워했고 증오했고 싫어했던 이들을 더이상 미워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을 내고 미움을 버리니 신기하게도 전보다 머리가 맑고 경을 읽는데도 더 경도 원만하게 잘 읽히더라구요. 경문도 뇌리에 더 선명하게 들어오고 말이죠. 지금까지는 화내고 미워하는 마음인 진심이 제 마음속 한켠에 줄곧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지금껏 기도를 할 때는 오늘 미움을 버렸을 때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집중력도 약했고 인식능력도 떨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하면 브레인포그 증상이 발생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계속 미움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으니 뇌가 완전히 맑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오늘 그렇게 미움을 버리고 기도를 하는데 다시금 미움이 또 올라오고 또 올라오고 하긴 했습니다. 지금껏 제가 살아온 시간동안 가졌던 마음의 습관 때문이겠죠. 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미움을 버리고 더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을요.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 머리도 맑아서 전보다 더 기도도 잘 되었고, 또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 제 마음도 전보다 더 밝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금강경 3분에 대하여 이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내가 모두 다 교화하여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라.(= 我應滅度一切衆生)
2. 이렇게 하여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지만(= 滅度一切衆生已)
3.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다 하라.(=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금강경 3분의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말입니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하죠. 불교를 한글자로 요약하면 心 이고, 글자 두개로 요약하면 지혜와 자비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지혜와 자비의 측면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자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모두 다 교화하여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는 마음을 내는 것.(= 我應滅度一切衆生)
이 대목은 대승불교의 정수를 옅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대목은 보리심을 낸 보살이라면 아직 연기법을 체득하기는 커녕 지식적으로조차도 알지 못할지라도 상관 없이. 일단 원수를 용서하고. 더이상 미워하지 않고. 원한을 버리고, 복수심을 버리고.
실체시로서 세상을 바라볼 지언정 그와는 상관 없이. 일단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라면 그렇게 미움을 버리고서는 일체 중생을 모두 다 제도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 이 대목은 이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 문장이 바로 위의 2번과 3번(멸도일체중생이滅度一切衆生已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보다 앞서 나오는 이유는, 반야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미움을 버리고, 복수심을 버리고, 더이상 미워하지 않으며, 사랑하고 자비심을 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일단 실체시를 한 상태일지라도 상관 없이(물론 반야 공을 알고있어도 상관 없습니다.) 일체중생을 구할 마음을 먼저 내는 것이 반야 공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미움을 더이상 품지 않고 자비심을 가지는 게 먼저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럼 되려 상대를 위한다고 하는 행위가 상대를 해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반야지혜도 함께 가지는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자비심을 내라. 사무량심을 내라. 즉 더 쉽게 말하면, 용서하라. 사랑하라. 연민하라. 자심을 가져라. 원수에게 조차도. 용서하고 미워하지 말아라. 용서해라. 미워하지 말아라. 그와 같은 대립심이 없는 마음으로서 우선 일체중생을 구하려 마음 크게 내고, 그 뒤 일체중생을 구하려 움직이되, 반야의 지혜를 갖추어 실은 구할 중생이라 이름붙일 만한 실체가 없음을, 일체가 꿈과 같음을 알라.
그렇게 알면서도, 자비심을 내서 중생을 구하되, 구해도 구한 바가 없이 구하라. 행해도 행한 바가 없이 행하라.
오늘 금강경을 읽으면서 금강경 3분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이렇게 덧붙여봅니다.
그리고 이와 연결된. 금강경 사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설 아이디어가 떠오른 바가 있어 이어서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위의 내용과 바로 이어지는 내용인지라 밑의 4분에 대한 해설을 쓰는 란이 아닌 바로 밑에 이어 붙이겠습니다.)
해서 색성향미촉법의 일체 경계를 실체시하지 말아라. 색성향미촉법의 일체 경계를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그걸 내것으로 취하려는 집착을 하지 말아라. 일체 경계는 이름붙일 이름이 없는 것인데 다만 중생들은 어리석어 이름붙이는 것이고, 여래는 이름 붙일 이름이 없음을 알지만(즉비) 중생제도를 위해 방편으로서 중생들이 이름 붙이는 대로 장단을 맞춰서 그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서 중생들 개개인에 맞는 방편(대기설법)으로서 실체가 없는 연기하는 현상에 대하여 다만 그 이름을 ~~라 할 뿐이다.(시명)
이와 같은 해석을 오늘 기도를 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금강경 주석서들이 많지요. 개중 이 같은 내용이 있는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이 자비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금강경 3분을 이와 같이 해석해 보는 것이 광덕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립심을 없애게끔 해주는 금강경 풀이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대립심이 없고 미움이 없을 때 결국 기도 수행도 성취할 수 있게 되고 괴로움도 소멸할 것입니다. (불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가르침입니다. 사성제가 불교의 뼈대이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결국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수행자라면 반야 공을 체득하기 위해서도, 스스로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스스로의 공부와 기도 수행의 향상과 성취를 위해서도,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도.
대립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복수심을 버리고. 사무량심을 내고, 자비심을 가지고, 일체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대립심과 미움을 더이상 갖지 않고,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고, 사무량심을 가지는 것은 출가자 본인만의 성불이 아닌 모두 함께 피안의 세계로 가자고 하는 대승의 정신에도 적합한 마음가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사무량심을 가지는 것 자체도 또한 불교의 수행법이기도 하며, 자비심을 가지는 것과 일체중생 모두가 과거생에 나의 부모님이었음을 알고 일체중생에 대하여 효성심을 내는 것이 보리심을 내는 조건이기도 하니까(효성심과 자비심이 보리심의 조건이라는 내용은 보리도차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면면들을 살펴 볼 때도 앞서 해본 풀이는 괜찮은 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한가지 지금 드는 생각이, 저는 자리이타란 결국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후라고 설명해야 될 것이 아니라, 자리와 이타가 상호의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 같은 상의성을 놓고 지혜와 자비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결국 지혜와 자비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한쪽이 성장할 떄 다른 한쪽도 함께 성장하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됩니다. 자리이타처럼요. 해서 앞서 我應滅度一切衆生 의 풀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무량심을 내는 것에 초점을 뒀지만서도, 또 지혜와 자비는 상의성을 띄는 것이기에, 결국 부처님 법을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지혜가 생기고 부처님 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과 동시에 자비심도 성장하게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더이상 미워하지 말아야겠다. 미워하지 않고 이제 사무량심을 내는 연습을 해 봐야겠다. 사무량심을 내자.'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결국 '내가 일체중생을 모두 다 교화하여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라는 결심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지금 드네요. 해서 그런 큰 보리심을 낸 뒤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보살도를 걷지만, 반야의 지혜로서 중생이라 할 실체가 없음을, 일체유위법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음을 알고. 또 그렇게 반야의 지혜로 무자성 공을 알고 꿈과 같은 실상을 알며 실체시, 집착, 머무름이 없지만 동시에 자비심을 품고서는 계속해서 보살도를 걸어나가며 하화중생을 해나가는 것. 그와 같은 인간상이 바로 보디사트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제4장 머무름 없는 묘행
“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어떤 법에도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니라. 이른바 형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 할 것이며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법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여 현상에 머물지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너의 아래 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겠느냐?”
“알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 해설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떻게 마음을 머물어야 하나요? 라는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다. 어떻게 마음을 머물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머무름 없이 보시하고 이타행을 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다. 반야심경에서는 색도 공하고 수상행식도 공하다고 나온다. 육근 육경도 공하다고 나온다. 공하다 함은 연기하기에 무자성이라는 말이다. 아도 법도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며 무자성이기에 머무르고 착지하고 안착할만한 발붙일곳이 없는것이 실상이다. 이 연기와 공이 실상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본질은 연기하는 것이고 무자성인 것이고 공한 것이다. 헌데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시색이라 한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로 오온 십이처 십팔계란 현상으로. 그런데 이 현상은 연기하는 것이기에 공하다. 색즉시공이다.
그리고 현상에는 개체적인 자아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사실 현상과 현상은 분리되있지 않다. 그렇기에 실상 색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란 현상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주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중생은 무명때문에 희론에 빠져있으며 실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분리하고 구분짓고 구별해서 바라보는 것이리라. 여하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이 같은 중생의 관점을 취해서, 현상에 실체(자성)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언어 문자 개념으로 이뤄진 명칭 즉 희론에 휘둘리지 말고. 다시 말해서 실체적인 관념이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전도몽상(착각)에서 벗어나서 연기법을 무자성을 공한 성품을 알고. 존재가 아닌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중중무진법계연기 인드라망 일즉다 다즉일의 실상에 부합함을 알고. 일체법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며,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 위함을 알고. 해서 정리하면 일체 모든것이 연기하기에 무자성이고 공하다는 것을 알고, 언어(언어는 항시성을 가지고 있다.)에 끄달려 실체시를 하지 말고. 현상을 구분지어 바라보지 말고.
나라 이름하는 것도 공하고 연기하는 현상이고 상대라 이름하는 것도 공하고 연기하는 현상이고 주는 물건도 공하고 연기하는 현상이니,
이 현상이라 함은 인연생기하는 흐름이고, 인연생기법의 실상은 중중무진법계연기이기 때문에 현상은 칼로 물이나 허공을 벨 수 없는 것과 같이 둘로 분리되어질 수가 없는 것임을 알고, 이 같은 연기법 즉 공성을 알아서 연기하는 현상에(흐름에) 실체적인 자아나 개체가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관념)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라는 것이다.
즉 오온이 다 연기적인 흐름인지라 거기에는 개체적이고 독자적이고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알고 보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로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관점에서 보자면 앞서 말했듯 일체법이 연기하기 때문에 색이라 이름붙이는 현상도 색성향미촉법이라고 이름붙이는 현상도 나,너,물건이라 이름붙이는 현상도 실상 모두가 상호의존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조건으로서 작용하는 연결된 관계(인드라망, 중중무진연기, 일즉다다즉일, One for all all for one.)이기 때문에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마치 주는자도 허공과 같고(실체가 없으니) 받는자도 허공과 같고 주는 물건도 허공과 같은데, 이 허공에는 구분선이 없고, 허공은 사실 이 허공과 저 허공이 분리될 수도 없고 허공은 헤아릴 수도 없는 것임으로, 이와 같은 연기적 관점을 체득하여 실체시를 떠나 머무름없이 보시함은 마치 허공이 허공에게 허공을 주는것과 같고, 허공은(연기하는 현상은) 분리된 것이 아니니 결국 하나의 허공만이 있다. 해서 이와 같은 연기법과 무아와 공을 체득한 자의 보시의 복덕은 허공과 같이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금강경 4분을 이런식으로 해석해보고 싶다.
(조금 해설을 추가해보자면, 중생세간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구성된 이름, 명칭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음을 알아서 모든 현상을 단지 연기하는 현상으로 바로 보며, 인연법과 공을 알고 자타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있기에 불이(不二)임을 알고, 실체적인 관념을 붙이지 않고서 베풀고 위하라는 것이 4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이건 미운사람이 준 물건이야.' , '이건 좋아하는 사람이 준 물건이야.' 와 같은 이런 실체적인 관념을 내지 말고, 단지 연기하며 나와 둘이 아닌 현상으로서 타자와 받은 선물을 바라보며, 받은 물건을 그저 자리이타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른 보살도(道) 라고 현실적으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적용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물론 이는 관념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일 뿐이지만, 이렇게라도 생활 속에서 금강경을 새겨보려하고 적용해보려 하며, 자꾸자꾸 금강경을 독송하고 연구하고 보다 깊이있게 진정으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체득하여 실천하려 노력하다 보면 피안의 세계에 조금씩일지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사바세계는 수행하기에는 아주 최적의 환경이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난이도가 극락같은 곳보다 높기에 그만큼 주는 경험치가 높은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해서 사실 이 후오백세 말법시대 사바세계에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수지하고자 함은 그 경험치가 실상 어마무시 할 것이리라. 이 어마무시함이라 함은 금강경을 자꾸 읽다보면 어느정도인지 조금식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에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이 세상속에서의 부귀정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는 차원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는 것이 결국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ㅎㅎ)
<추가적으로 든 생각>
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연기하는 실상을 바라볼 때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주는 물건도 모두 나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으로서 존재하는 중중무진법계연기, 인드라망이 세상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연기하는 흐름 속에는 자아라 할만한 실체는 없지만 말이다.
자신의 성품은 연기 무자성 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허공은 실상 둘로 분리되있지 않듯 현상은 둘로 구분지을 수 없다.
강과 바다를 어떻게 구분짓는가? 강과 바다의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가?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그 흐르는 물의 흐름을 타고 끊임없이 모래도 자갈들도 이동하기 때문에 강과 바다의 명확한 경계선상을 실재로는 설정할 수 없다. 같은 이치에서 우리는 씨앗과 새싹의 명확한 경계선을 설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물, 나와 세상 사이에도 성립되는 이치이다. 그러나 강과 바다 내지 씨앗과 새싹의 경계선상보다도 사람과 사람은 거리가 좀 더 벌어져 있는지라 보다 구분지어서 개체적이며 실체적으로 바라보기가 쉽다. 그러나 실상은 일체의 현상은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허공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필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육안으로 볼 때 보다 개체적이고 독자적인 자아가 있다고 보기가 쉬운 육신을 받게된 인연은 결국 중생의 무명에서 기인한 실체적인 견해라는 어리석음과, 거기서 기인한 이기심과 자만심 자존심 등의 아상(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때문이 아닐까?' 육도윤회를 하는 중생들의 육신은 과거생 지은 업이 원인이 되서 받는 결과물이니 말이다. 외도들이 태어나는 천상 중 하나는 생각이 없는 상태의 돌맹이같은 몸을 받는 곳이 있다고도 하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천상이 아마 무상천이라 이름하는 듯 한데 정확한건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묵스님의 책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추가
무주상보시는 보시바라밀과 같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상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시이다.
인색함, 이기심, 자존심, 자만심 등이 곧 아상이고 어리석음이다.
하심하는 것과 공경하는 것 역시 아상을 버리는 좋은 방법이다.
그렇기에 상불경보살님과 같은 수행 역시 아상을 버리는 좋은 수행이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더불어 아상을 버리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계정혜 삼학도를 닦아야 한다. 이건 정말 정말 명확한 것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정학과 혜학은 결코 닦을 수 없다. 계를 지키는 것이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결국 계는 부처님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불보살님들 역시 계를 지키셨기에 결론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불보살님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이를 새겨보면 계는 무진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부대중 모든 불자님들에게 있어서 '계 = 스승' 인 것이다.
밑에 글도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금강경 4분에 대한 추가적인 해설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만한 법상스님의 법문입니다.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m/5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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