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도하는데
집착을 놓고싶고
관심을 끄고싶은데 그게 안되서 힘들고 괴로웠다.
근데 문득 이런 통찰이 되었다.
법륜스님의 가르침과 같이.
'안놔지면 계속 쥐고(갖고) 살면 되잖아?.' 라고.
억지로 놓으려 할 필요도 없었다.
억지로 놓으려고 하는것은
놓으려고 하는 것을 실체시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몸에 불편한 감각이 일면 그냥 생각이 떠오르는데로 몸에 불편한 감각이 있는데로.
힘들면 힘든데로 아프면 아픈데로 불안하면 불안한데로 두려우면 두려운데로
정신이 산란하면 산란한데로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걸 실체시하지 않는 이상,
그건 더이상 나쁘다고 이름붙일만한 실체가 없는 그냥 환상같은 것일 뿐이었으니깐 말이다. 나쁜것도 아니고 좋은것도 아닌데 딱 정해진 의미가 없는 환영과 같고 헛깨비와 같은 것을 굳이 없애려 할 필요가 없음이 통찰되었다.
생각이 일면 일어나는데로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내 생활을 하고, 기도 할때는 그냥 기도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 불편함을 내버려두면 어짜피 제행무상인지라 알아서 구름이 사라지듯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더군다나 이 같은 통찰도 들었다.
'그러던가 말던가 어찌되든지 말든지 어짜피 자성이 없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동안 걱정하던 일들은 모두 좋은건 취하고싶고 나쁜건 피하고싶고 마음에 드는 일들은 일어나길 원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길 원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원하고 원하지않고와는 관계없으며 내 가치판단과는 무관하게
금강경에 나오듯 제법은 높고낮음이 없다.
제법은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해서 물론 일상을 살아가려면 분별을 해야하지만
수행적으로는 수행을 할때는 나쁜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좋은일은 일어나길 바랄것이 없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었다 사실은. 관점만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 관점을 놔버리고 연기-무자성-공을 관하는 수행적 관점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나든 말든, 적어도 수행을 할 동안은 상관이 없었다. 누가 잘되건 말건 누가 악업을짓건 선업을 짓건 공을 관하는 입장에서는 좋고 나쁜 실체가 없음을 보고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든지 저러든지 이러든가 저러든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수행적 관점에선 애초에 나도 남도 없었다. 이름붙일 실체는 이 현상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그냥 지금 이대로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든 좋고 나쁘다 할 실체가 없으니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오늘 기도를 하며 이 같은 생각으로서 일어나는 경계에 일회일비 하며 끌려가지 않고 기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경계가 어떻건 말건 무슨일이 일어나건 말건 누가 뭘 하든 말든간에 상관이 없었다.
어짜피 그것들은 무자성한 현상이어서 이름붙일 이름이 없는 공한 것이기에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그림자 신기루 아지랑이 물안개 같은 것일 뿐이었다. 현대적으로는 포그스크린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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