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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한구절을 나름대로 풀이(해설)해 봤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0. 29. 13:25

일체 중생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생사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고, 생사와 열반, 그 가운데에도 머물지 않는다.


출처 :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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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법문) 다시 보는 법문(38)

일체 중생은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생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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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전구절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풀이(해설)>


일체중생은 연기하기때문에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기한다 하는 것은 중생 내지 이름에 부합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기에 이를 보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있다는 것은 실제로 있다는 것이고, 실재한다는 것은 '무엇'이 실재한다는 말이기에 그 무엇에 해당하는 대상이 실재로 존재해야 하는데,

일체 삼라만상은 연기하기 때문에 그 '무엇'이라 이름붙일 만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라 이름붙일 실체를 찾아보려 해 보아도 모든것은 조건에 의지해 이합집산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무엇' 이라는 명칭, 이름, 개념, 호칭, 언어에 부합하는 실체는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중생은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영원불멸하게 존재하는 실체가 없기에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에 의지해서 인연생기하는 우리 육근으로 인식되고 느껴지는 현상이 있기에 없다고 할 수도 없지다. 고로 인연법으로 생멸하고 이합집산하는 모든 현상은 꿈처럼 환상처럼 물거품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또한 이 현상들은 번개와같고 이슬과 같이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번개가 찰나지간에 생멸하듯, 일체유위법은 긴 시간을 놓고 봤을 때 찰나지간이나 다름없는 일시적인 순간동안만 존재한다. 또한 인간의 생은 지나고보면 찰나였다고 느껴지기 마련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 젊다고 교만하면 어느샌가 나이가 들어있기 마련이고 금방 늙게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꿈같고 무상한 자신과 세상사람들과 삼라만상에 우리는 늘 언어로 된 명칭을 붙여 부르지만 실상 그 명칭에 부합하는 고정불변하고 영원불멸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자신에게서, 대상에게서, 세상 사람들에게서, 삼라만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깨달으신 부처님의 시각에서는 모든 유위법은 꿈, 환상, 포말(물거품), 그림자, 신기루, 무지개, 안개, 번개, 이슬 같이 존재한다고 보이시는 것이리라.

여기까지가 일체 중생은 있는 것이 아니다. 에 대한 저의 해설이었습니다.

밑의 내용은 아직 저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제하고 그냥 제 생각대로 해설해 보자면,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는  앞서 말씀드렸듯 연기하여 무자성이기에(고정불변하며 독립적인 실체가 없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가르침과 같이 공은 아무것도 없는것이 아닌 오온으로 십이처로 십팔계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실체는 없지만 묘하게 - 꿈같고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신기루같고 무지개같고 안개같고 번개와 이슬같이 - 나타나기 때문에, 이 묘한 현상을 보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럼으로 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연기법(=무자성=무아=무상=공=중도)이 묘하게 나타나는 이 현상을 보자면 중생이라 이름할 실체는 없지만서도, 그리고 모든 것이 인드라망으로 연결되어서 서로 연결 안된 것이 없는 법계무진중중연기가 실상이지만서도,

깨닫지 못한 중생의 관점이란 언어를 사용하며 이분법적이기 때문에, 이 같은 중생의 입장에서는 구분짓고 차별하고 분별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 같은 중생의 관점에서는 본래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중도적인(팔부중도이며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며 없지도 있지도 않은) 실상을 구분지어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 같은 중생의 관점에서 볼 땐 자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것도 아닌 이 현상에 언어를 사용해서 이름을 붙여서 구분짓고 차별하고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며 실체시하고 실재로 있다고 생각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이 같은 중생의 입장에서는 중생, 나, 너, 자동차, 열반, 태어남, 죽음이라 할만한 것이 '있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불보살님들은 한량없는 무한한 대자대비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불보살님들은 착각(전도몽상)속에서 살아가고  그 착각 속에서 어리석어서 탐내고 성내며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불보살님들께서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연민하시어 제도하시고 구제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보살님들께서는 생사와 열반이라 할 실체도 없음을 아시며, 오온  십이처 십팔계 그리고 무명 과 무명이 다함, 십이연기, 고집멸도, 지혜와 얻을 것이라 이름붙일만한 실체도 없음을 아시고서는

생사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고, 생사와 열반, 그 가운데에도 머물지 않는다.
는 것이 아닐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보살님들과 같이 무아, 무상, 제법공상, 아공법공, 제법무자성, 연기법, 중도를 깨달으려면(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닌 체득하려면) 수행을 해야 되며, 이 수행이란 계정혜 삼학도로서 계율을 지키며 지관수행을 하는 것이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수행에는 염불 참선 독경 간경 주력 절 그리고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등이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은 관념에 집중하는 것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실제로 경험가능한 유일한 대상인 실체의 느낌과 정신작용(즉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등의 현상을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 같은 위빠사나 수행과 무상 무아에 대한 통찰이 담긴 좋은 책을 추천드리자면 <바라는 것이 없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 - 묘원 지음> 란 책이 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생사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고,생사와 열반, 그 가운데에도 머물지 않는다.


라는 화엄경의 경전구절을 읽고서 제 나름의 해설을 적어봤습니다. 아직 배움이 적어서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명쾌하게 잘 풀이가 안되며, 앞서 적은 다른 내용에 대해서도 미흡하거나 옳지 않은 해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흡한 실력임에도 지금껏 공부하고 수행하며 배우고 느낀 바를 거의 총 동원해서 스스로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이렇게 부족하지만 한번 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혹시나 잘못된 내용이 있다거나 한다면 가르쳐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무 불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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