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가 무엇인지 지금껏 제가 공부하고 사유해보며 나름 정리된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언어에 걸리지 않는 보시.
2. 연기법을 알고 하는 보시. 즉, 무상 무아를 알고 아는 보시. 다시 말해서 중중무진법계연기를 알고 하는 보시. 다시 말해서 불이법을 알고하는 보시.
이것이 오늘 정리된 무주상보시에 대한 저의 개념입니다.
일단 1번. 언어에 걸리지 않는 보시라 함은, 언어는 항시성이란 특성을 지닙니다. 그런데 현상계의 본질이자 실상은 연기법입니다. 조건따라, 조건에 의지하여 생멸하고 이합집산합니다. 해서 유위법의 범주에 속하는 삼라만상 일체 현상에는 항상함이 없고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언어를 쓰게 되면 이런 현상의 실상이자 본질과는 맞지 않는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나 너 개똥이 길똥이 토끼 강아지 등등.. 그럼으로 언어를 사용은 할지라도 그 언어가 지칭하는 존재가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인 실체가 있다는 생각이 없이, 일체유위법이 연기함을 알고 보시하는 것이 언어에 걸리지 않는 보시이며 이것이 무주상보시라고 저는 정리하였습니다.
2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번은 사실 앞서 절반가량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연기법을 알고 하는 보시. 연기법의 다른 이름이 무상이며 무아입니다. 또한 연기법의 또 다른 이름이 중중무진법계연기입니다. 그리고 무상 무아가 결국 중중무진법계연기이기도 하죠. 앞서 1번을 말씀드릴때 이미 연기와 무상 무아에 대해선 설명드렸습니다. 연기는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연생기법의 줄임말이 연기법입니다. 인연법이라고도 하고 인과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연기하는 현상을 살펴보면 조건에 의존하여 생멸하고 이합집산하며 변화합니다. 이렇게 조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은 항상함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변하고 흐를 뿐이죠. 이렇게 변하고 흐르는 현상에는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란 없습니다. (고로 힌두교에서의 아트만이라 하는 것은 사견입니다. 정견, 즉 바른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죠. 정견은 연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연기 무상 무아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럼 중중무진연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사유해보면 세상 모든 것은 서로서로 모두 연결되있고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고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 간접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이죠. 이것이 중중무진법계연기입니다. 하여 2번에 대해 설명드리자면, 세간을 살아가는 중생들은 나와 나 아닌것으로 현상을 차별하고 구분지어 바라봅니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게 이분법적 속성을 지니죠. 허나 실상 하나는 모든것의 조건이 되고 모든것은 하나가 있게끔 하는 조건이 됩니다. 인드라망이란 말도, 일즉다 다즉일이란 말도, 일념삼천이란 말도 있지요.(일즉다 다즉일과 일념삼천에 대해선 사실 이 맥락에 확실히 맞는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만ㅎㅎ; 그냥 붙여봅니다ㅎㅎ) 그럼으로 중생은 이 육신과 자신의 정신작용인 수상행식 즉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고 자아라고 생각하지만, 2번의 내용을 알아서 - 즉 중중무진법계연기를 알아서 현상의 실상적으로 볼 때 굳이 나라고 이름붙일 대상은 그간 나라고 생각해온 오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법계 모든임을 알고 보시하는 것. 이것이 2번에서 말씀드린 무주상보시입니다.
즉 다시말해서 우리 범부중생들은 내가 있고 상대인 개똥이도 길동이도 있다면, 2번을 아는 사람은 개똥이도 길동이도 이 오온이 있게끔 하는 조건이 되며 법계의 모든 조건들 역시도 이 오온이 있게끔 하는 조건이 됨으로 길동이 개똥이를 비롯해 일체중생을 나라고 여기며 대하고 보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보시하는 것이죠.
또한 1번에 대해 조금 보충해서 말씀드리자면 1번에선 언어에 걸리지 않음을 말씀드렸는데요, 우리는 언어에 걸릴 때 이익과 손해를 나와 나 아닌것을 구분짓습니다. 줬다 받았다를 구분짓기도 합니다. 언어는 이렇게 이분법적이며 항시성을 띄지요.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 1번과 2번을 잘 알고선 보시할때 우리는 연기법을 알고선, 언어에 걸리지 않고서 보시하기 때문에 바라는 바 없이 보시하게 되며, 조건 없이 보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시는 태양과 물과 대지와 걸레등 자연물들이 행하는 바와 같지요.
태양은 바라는 바와 조건없이 빛을 흩뿌리고
물은 분별없이 만생명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더러운걸 싰어주며
대지는 분별없이 조건없이 만생명을 소생시킵니다. 더불어 대지는 똥도 가래도 오줌도 침도 오물도 모두 조건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걸레도 마찬가지지요.
무주상보시란 이와 같이 상에 걸리지 않고, 언어적 관념에 걸리지 않고, 아군과 적군을 구분짓지 않고 빈부귀천과 부처님과 보살님과 연각님과 성문님과 중생을 구분짓지 않고 평등하게 행하는 보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오늘까지 불교를 공부해보며 정리한 무주상보시입니다.
추가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금강경에서는
불 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약비유상 비무상 아개영입무여열반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실무중생 득멸도자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일체중생을 성불에 이르게 하겠다는 마음인 보리심을 가지는 것도, 그리고 무상 무아를 체득함도 무주상보시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상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할 것입니다.
고로 우선적으론 갈애가 집착과 행위로 발전하지 않게끔(12연기의 '촉 - 수 - 애 - 취 - 유' 에서 애가 취로 넘어가지 않게끔)
바라는 마음도 없애려는 마음도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도(즉 갈애를) 잘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입니다.
_____
이 글을 쓰기위한 조건이 된 좋은 불서와 법문들(최근에 본 것들 위주로, 생각나는 것들을 써보겠습니다.)
<법문>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불서>
불교의 체계적 이해/고익진 지음/광륵사
육바라밀/성재헌 지음/민족사
바라는 것이 없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묘원 지음/행복한 숲
실천적 불교사상/법륜스님 지음/정토출판
인생에 한번 금강경을 읽어라/월운스님 지음/ 금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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