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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성난 물소 놓아주기 (초중반 ~ 중반부 내용)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4. 16:09

성난 물소 놓아주기 초반 ~ 초중반까지의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링크 : https://findthebrightroad.tistory.com/5291

[북리뷰] 성난 물소 놓아주기 (초반 ~ 초중반)

책을 40여 쪽을 읽고 쓰는 감상문입니다.기억나는것만 제가 이해한 대로 적어보겠습니다.°°°염오하라.본질을 똑바로 꽤뚫어 알아라. 모든 것의 본질은 괴로움이다. 경계를 없애려 하지도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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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물소 놓아주기. 아잔 브라흐마 스님의 저서다. 참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난 이후 필자는 많이 행복해졌다.
 
책의 초 중반부부터 중반부까지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배운 내용을 서술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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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진짜 스승은 어느 절의 큰스님 내지 대사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들이 아니라, 내게 일상속에서나 수행을 할 때 찾아오는 여러 번뇌들이다. 그런 번뇌들을 잘 주시하고, 관찰하고, 연구하고, 그런 번뇌에 대하여 공부할 때 우리의 수행은 진전되게 된다. 가령 아침에 따뜻한 이불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 아님 명상을 할 때 꾸벅꾸벅 졸게되거나, 때로 지루함이 몰려올 때. 그런 상황이 곧 참다운 스승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번뇌즉보리라는 말이 생각난다. 세상은 불이법이다.)
 
관여하지 마라. 내버려둬라. 생각은 내가 아니다. 육신도 내가 아니다. 타인 역시 내가 아니다.
세상은 오온의 집합이다. 그 오온은 내가 아니다. 오온은 연기하는 흐름이다. 원인이 있어 그 원인에 의존해 발생하는 결과일 뿐이다. 생각이 연기하는 것임을 알라. 그래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든 그 생각을 바꾸거나 없애려고 하지 마라. 그럴 때 당신은 성난 물소를 놓아주는 격이 된다. 성난 물소를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 하다가는 더 피곤하고 괴로운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물소가 순간적으로 흥분해 날뛸때는 날뛰라고 내버려두는 것이 지혜롭다. 그래야 물소의 주인은 다치지 않을 수 있다. 흥분한 물소를 즉시 통제하려고 한다면, 물소를 묶어둔 밧줄에 이끌려 주인이 다칠 수도 있다. 그럼으로 물소의 주인은 물소가 흥분해 날뛸때 물소 알아서 하고싶은데로 하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 지혜다. 그럼 잠시 후 물소는 흥분이 가라앉고 잠잠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흐를 순 있고, 물소를 따라서 조금 걸어야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단지 성난 물소를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고 단지 주시하며 따라갈 때, 물소의 주인이 다치거나 병원에 갈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생각이 물소와 같다. 정신작용도 육신도 그리고 이 세상도. 즉 육경과 육근과 오온이 모두 물소와 같다. 
 
그럼으로 이 오온의 작용이 때때로 자신의 뜻에 맞지 않게 일어난다면. 그냥 내버려두어라. 때로 잡념이 산란하게 일어난다면. 그냥 내버려두어라. 관여하지 말아라. 그 생각은 내가 아님을 알아라. 그 생각은 단지 조건에 따라 연기한 것임을 알아라. 해서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고 단지 주시할 때 금방 그 생각은 힘을 읽고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연기한 것이다. 
 
(단 단지 일어나는 생각이 있는가 반면,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의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업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구업과 신업을 짓는 것일 것이다. 업을 지으면 육경에서는 그 업이란 자극에 대한 반응이 필연적으로 발생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업이 원인이 되어서 발생하는 결과라 하여 과보라 한다. 그럼으로 일어나는 생각은 내가 아님을 알되, 그렇다 하여서 자신이 몸과 말과 의도(뜻, 생각)로 짓는 행위까지도 부정해서는 안되며, 현실세계를 살아가면서 십악업을 짓지 않고 십선업에 해당하는 행위를 많이 지으려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칠불통계계 -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 에도 어긋나지 않는 이해이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도나 명상을 할 때면 어떠한 생각들에 빠져들곤 한다. (해서 염불을 하면서도 필자 역시 입으로는 염불을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던 경험이 많이 있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생각하는 대상을 자신이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며, 세상의 본질이자 삶의 본질을 명확하게 꽤뚫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아잔 브라흐마 스님은 말씀해주셨다. 
 
세상의 본질은 고다.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내지 열반적정) 이 세가지가 삼법인 아니던가. 이 중 일체개고란 진리이며 사물과 현상의 본질이라고 예기할 수 있다. 일체개고란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왜 괴로움인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움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움은 일시적인데 그런데 왜 모든것은 괴로움일까? 그 일시적인 즐거움이 다하는 순간에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해서 인간의 삶은 괴로움이다. 고통이다. 즐거운 순간은 일시적이다. 순간이다. 그 순간이 끝나면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찾아온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 친지들. 사랑하는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모든건 변화하기 때문에, 즐거운 상황을 구성하는 조건 역시도 변화하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변에 좋아하던 사람들이나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조건들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물론 마찬가지로 편안함을 주는 조건들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반면 그 자리에 원수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삶이란 그렇다. 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도 있고,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도 존재한다. 삶이란 그러하다. 제행무상이라 하였다. 형성된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다는 것이다. 인연에 의존하여 생성된 모든 것은 인연에 의존하여 이합집산하고, 성주괴공 생주이멸 생노병사의 흐름대로 일어났다 사라진다. 육신도 별도 그렇지만 생각도 마찬가지다.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서로서로 연결되있다. 분리된걸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분리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중생의 육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여러 가지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사물과 존재들로 분리되있고 구별되있고 구분지어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중중무진법계연기이고 인드라망이다. 서로간에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서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상호의존성 즉 연기법이 세상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이 생각도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은 사실 내가 아니며 내 일도 아닌 것이다.

생각 뿐만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것이 나의 일이 아니다.
 
명상을 원만하게 하려면 이를 알아야 한다. 해서 자꾸 뭘 얻고 채우고 성취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고 비워내고 또 비워내는 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선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명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실체적인 관념으로 바라봤던 것이 연기하는 것이며 나도 나의 것도 아님을 알고서는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는 과정을 반복하는 그 길을 나아가는 것이 곧 수행이오 명상이다. 그리고 그 길을 지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인연이 갖춰졌을 때 선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란다고 선정이 발생되는게 아니라 선정이 발생될 인연이 조성되었을 때 선정이 발생되는 것이다.)
 
해서 수행자는 실체적인 관념을 계속해서 비워야 한다. 이름을 붙이지 말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서양식 교육의 폐해는 이름붙이기 이다.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 교육이 서양식 교육이다. 이 교육의 폐해는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점이 서양식 교육에 있다. (반면 금강경은 어떤가. 금강경을 읽어보라. 반야심경을 읽어보라. 금강경의 논리는 이러하다.

- 큰 몸이라 하는 것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 -

중생들은 큰 몸 작은 몸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지어 바라본다. 해서 큰 몸이란 실체가 있는 줄 알고 작은 몸이란 실체가 있는 줄 안다. 하지만, 이는 언어에 끄달린 것이고 개념에 속은 것이다. 언어는 항상성이란 속성을 지닌다. 항상성. 언어로 이루어진 이름, 명칭, 개념이란 놈이 의미하는 독립된 대상은 항상하고 고정불변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행무상이기에 항상한 것은 없다. 그리고 제법은 연기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 제법무아이고 제법무자성인 것이다.

하여 연기하기 때문에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은 없다. 언어로 구성된 명칭, 개념, 이름에 해당하는 실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으나 인연생기하는 현상은 존재하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이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공은 색수상행식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이 오온 12처로 나타난다. 18계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이 오온 12처 18계는 다만 명칭일 뿐 실상을 바라보자면 이 오온 사이, 12처 사이 18계 사이에는 구분선이 없다. 실상 모두 연결된 하나의 흐름이오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중중무진법계연기이며 인드라망이다.)

그럼으로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붙이지 말아보라. 수행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라.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성냄도 생긴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란 번뇌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다.

더불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경계를 만났을 때는 그 경계를 바꾸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지 마라. 왜냐면 바꾸거나 없애려고 해봤자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그 경계는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나'라면 그것이 내 뜻대로 움직이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신작용도 육신도 외부대상도. 그것이 일어난 이유를 생각해보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 사물, 현상의 본질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하는 것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그것은 일어날 인연이 형성되서 일어난 것이다. 내가 일어나지 말라 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게 아니고 내가 바뀌거나 없어지길 바란다 해서 바뀌거나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일어날 인연이 조성되니 일어난 것이고, 변화하거나 흩어질 인연이 형성되었을 때 변화하고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해서 그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의 본질은 무상한 것이고, 연기하는 것이며, 더불어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 현상 속에는 자아라 할만한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다.) 해서 일체개고이다. 세상의 본질은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된 욕심과는 무관하게 조건에 의존하여 이합집산하는 연기법(중중무진법계연기)인 것이다.
 
이를 알고 수행자는 하나씩 하나씩 계속해서 집착하고 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놓고 놓고 놓고 비우고 비우고 비워내며 이 육신과 정신작용에 대한 집착을 다 버렸을 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일체 경계는 내 일이 아니다. 중중무진법계연기의 일이다. 인연법의 일이고 연기법의 일이다. 물론 자신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하지만 제한적이다. 그리고 그 제한적인 할 수 있는 일. 즉 신구의로 짓는 업으로 인한 결과는 자신에게 달린 영역이 아니다. 중중무진하는 법계의 일이고 연기법의 일이다. 인연법의 일이다. 이 결과는 자신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그럼으로 그 결과는 연기법에 맡겨라. 하늘에, 법계에, 법신불에, 비로자나부처님께 맡겨라.
 
그리고 실상 제한적으로나마 무엇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제한적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일 지구가 아닌 달에 우주복도 없이 사람이 있다면, 얼마 안가서 숨이 막혀서 죽고 말 것이다. 그럼으로 수행자는 연기하는 현상에는 자아라 할 실체가 없음을 알고, 그 현상이 자신이 아님을 알고, 관여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관여하지 않는 지혜를 생각 등에 사용할 때 성난 물소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과 같이, 금방 그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
 
명상을 하다가 때로는 졸음이 올 수도 있다. 피곤함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졸음과 피곤함을 없애거나 바꾸려 하지도 말라. 단지 함께 있어 줘라. 그리고 단지 그러한 졸음과 피곤함이란 경계를 주시하라. 알아차림하라. 
 
- 기억나는 내용을 제 식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책에는 명상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이 중반부 즈음에 친절하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고 필자는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책입니다. 수행은 번뇌를 놔버리고 버려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탐진치 삼독심을 비우고 놓고 버리는 과정이 수행인 것이죠. 이런 수행관으로 봤을 때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졸음, 산란심, 분노, 탐욕 등 여러 번뇌가 일어날지라도 괴롭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이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이 이 책에 아주 친절하게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장황하게 그냥 생각나는 바를 정리해놨지만, 그 핵심은 연기법을 알고, 그 번뇌나 역경계가 내가 아님을 알고,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필자는 파악했습니다. 더불어 지금 이대로도 충문히 만족하는 마음가짐 역시 탐심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태도이죠. 해서 번뇌가 일어나도 바꾸거나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난 물소를 내버려두고 그저 주시하듯, 그런 번뇌나 역경계도 그저 내버려두고, 함께 있어주고, 단지 주시하는 과정이 번뇌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방법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배운 내용입니다. 참 좋은 책이지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마하 가섭은 두타제일이었습니다. 두타행이란 버리는 것이라고 필자는 배웠습니다. 비우고 버리고. 간소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타행의 참다운 의미는 번뇌를 버리는 것이라고 필자는 배웠습니다. 이 같은 두타행을 하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