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나를 읽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자동차를 좋아했다.
부모님은 아이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많이 선물해주기도 하였다. 아이는 스포츠카를 자주 멋있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아이는 어린 시절 생각했다.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 자동차를 몰고싶다.'
그런 아이가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되었다. 군대를 갔다오고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였다. 그렇게 직장을 어느정도 기간동안 다닌 청년에게 어느날 스포츠카의 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콘텐츠가 눈에 띄게 되었다.
청년은 그 콘텐츠를 본뒤 어찌 생각이 이어지다가 스포츠카 게임을 구매하게 되었고 이후 그 게임을 천시간 이상 하였다.
이것이 인연과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
단 콩심은데 콩이 날 조건이 갖춰질때 싹이트고 콩이 난다. 팥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다.
어렸을적 아이는 씨앗(인)을 심었다. 빨리 커서 자동차를 운전하고싶다는 생각. 스포츠카가 멋있다는 생각. 이 생각들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분류한다. 업이란 행위란 뜻이다. 행위에는 몸으로 하는 행위, 말로 하는 행위, 생각으로 의도로 하는 행위가 있다. 어린 아이는 생각으로 하는 행위, 즉 의업을 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이는 청년이 되었고, 자립해서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연)이 갖추어지자 청년이 아이 때부터 현재까지 가지고있던 자동차를 스포츠카를 좋아하는 마음과 이 조건이 만났고, 청년은 스포츠카 게임을 구매하여 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와 같이 인과 연이 만나 화합할때 결과인 과보가 발생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인연생기법. 줄여서 인연법이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 하여 인과법이라고도 한다.
인간 삶을 볼 때 인이라 함은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며 이 인은 행위자가 짓는 행위를 말한다.
연이라 함은 간접적인 원인을 말하며 이 연은 시공간적인 삼라만상에 해당하는 요소들, 조건들을 말한다.
부처님은 현상계의 모든 일들, 상황들, 현상들은 모두 인연생기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보자면
지금껏 만나온 모든 상황들도.
지금 만나고 있는 상황도.
모두 인연에 의지해서 발생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인이란 과거에 내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었던 행위를 말한다.
인과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
그럼으로 괴로운 상황은 과거에 내가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 이간질 욕설 꾸밈말을 하고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이 되고, 이 직접적인 원인이 시공간적인 범주에 속하는 간접적인 원인(연)과 만나서 발생된 결과(과보)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 괴로운 상황을 맡딱뜨렸을 때는 불교에서는 지난날 내가 지은 악업(악한 행위)을 참회하고, 선업을 지으며, 기도하고 수행하고 법문을 배우라고 말한다.
더 자세하게는 괴로운 상황을 만났을때는 참회하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을 닦으라고 말한다. 계정혜 삼학도를 닦고 팔정도를 닦으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래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과거의 업장을 소멸시키며 점차 삶이 밝아질 것이다. 향상하는 것이다.
불교는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사주팔자는 태어난 년월일시에 따라서 인생은 결정되어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또 다른 사상 종교중에는 인생은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되어져 있다고 예기하기도 한다.
이는 진리가 아니다.
자극과 반응이 있다.
자극은 과거 내가 지은 행위로 인한 결과물이다. 내게 닥치는 상황이 자극이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그리그 이 반응은 행위이다. 이 행위(반응)에 따라서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럼으로 부처님은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며, 삶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두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악업이 아닌 선업을 짓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생사고락의 모든 차별 법을 초월하여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이치(가 있다.)
- 사십이장경 中 -
이와 같은 이치를 가르친다.
우리는 선업을 지어서 복을 짓는것과 더불어 법문을 꾸준히 듣고 불교공부와 수행을 해나가며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고자 지혜를 닦아나가며
복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신 부처님과 같이 되고자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미처 이야기 못하여 추가적으로 몇줄 내용을 덧붙이려 한다. 자극과 반응. 이 사이에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있다. 더 세밀하게는 알아차림과 자유의지가 있다. 그리고 불교적으로 자극은 과보이며 반응은 신구의(몸과 말과 생각 으)로 짓는 행위(업)를 말한다.
그럼으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기에,
우리는 단지 알아차리며 일어나는 화나 탐욕심을 바라볼 수 있고,
또 반응을 하더라도 괴로운 결과를 발생시키는 십악업이 아닌 즐겁고 이익되는 결과인 십선업에 속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불자란 이와 같은 원리를 알아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정진하며 보다 밝고 원만한 삶을 창조해나가는 부처님의 제자이며 자식이다.
유튜브 추천 채널(법문)
- 광우스님의 소나무(BTN)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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