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반야경 공부 -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

[생태적으로 이해하는 선사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아니다. 그렇다’ - 유정길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4. 12. 16. 12:24

https://ecosophialab.com/%EC%83%9D%ED%83%9C%EC%A0%81%EC%9C%BC%EB%A1%9C-%EC%9D%B4%ED%95%B4%ED%95%98%EB%8A%94-%EC%84%A0%EC%82%AC%EC%9D%98-%EB%B2%95%EC%96%B4-%EC%82%B0%EC%9D%80-%EC%82%B0%EC%9D%B4%EC%9A%94-%EB%AC%BC/

[생태적으로 이해하는 선사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아니다. 그렇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ecosophialab.com


산은 수많은 산 아닌 것들의 연기적 관계 속에 만들어진 존재이며, 물도 물이 아닌 것들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존재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있던가? 나라는 존재 또한 나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내 이름은 내 고유의 이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위해 방편적으로 만들어진 명칭일 뿐이다. 의자는 의자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 다른 곳에서는 체어(Chair)라거나, 이수(いす)라고 부르는 존재이다. 명칭은 그저 그것의 이름일 뿐 본질은 아닌 것이다. 본질은 결국 어떤 이름을 부르든 관계없이 거기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산은 산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름하여 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설령 ‘바다’라고 부른다고 해도 실제는 변함없다. 그러나 우리는 명칭이라는 방편에 내둘린다. 산이라는 고정된 이미지, 바다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산은 이름하여 그냥 ‘산’이라고 붙여도 물을 그냥 ‘물’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름과 방편에 속고 끄달려 진실의 실제가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방편에 매여 담마를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환경과 생명의 가르침)는 바로 그 실체를 보는 안목이다.

- [생태적으로 이해하는 선사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아니다. 그렇다’ 中 (유정길 녹색불교연구소소장) -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이자 녹색불교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행공동체 정토회에서 25년 살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개발협력활동을, 평화재단에서남북문제를 위한 활동을, 고양시에서 지혜공유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을 했습니다.



위 글을 읽고 가명에 끄달려 (제법이 연기하기에) 둘이 아닌 실상을 망각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실상은 불이법인데 중생은 무명으로 착각 속에 빠져서 실상인 연기법을 모르고 언어 문자 개념으로 이뤄진 희론이란 항상성과 실체성이 있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실체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성이란 성질을 지닌) 언어에 묶여서 (연기하는 현상에는 실체가 없으며 구분선도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나와 남을 분리된 존재이며 개체적 존재이고 각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것이 전도몽상이겠죠.

(앞과 뒤, 위 아래가 뒤바뀐 생각이자 현실이 아닌 꿈을 현실처럼 여기는 생각이 전도몽상일 것입니다. 진정 중요한 진여 불성은 잊고 희론에 얽매여서는 개체적 관념과 같은 사견에 빠지고 허망한 유위법을 상락아정하다고 착각하여 삶의 우선순위로 놓으며, 진정 상락아정하는 속성을 지닌 진여와 열반을 깨달아 성취할 수 있는 참된 행복과 자유가 아니라 탐진치와 오욕락을 상락아정한다고 착각하고선 그것을 우선순위로 놓고 그것만을 추군하며 살고 있는 중생사는 앞뒤와 위아래가 뒤바뀐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삶이 곧 몽상이기도 하겠지요. 정견이 없이 희론에 얽매여서는 있지도 않은 허망한 관념을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붙잡으려하고 그것을 구하려 하고 그것에 머물려하는, 사견이란 프레임을 쓰고서는 헛깨비를 쫒는 삶이니까요. )

꿈과 같은 연기하는 실상을 언어 분별 희론에 얽매여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제법공상 불이법의 반야의 지혜로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습니다.


{교리를 공부해보면 현상은 인연화합으로 연생연멸 연기하는 것이고, 이름과 개념도 모두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는 것인지라(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자타 산과 물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가 모두 연기하는 것이며 제법이 공한 것이고, 둘이 아닌 불이법이 제법의 실상이고, 본래면목 진여불성으로 가면 또한 그 경지에서도 차별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는 게송의 뜻에 대하여 위 칼럼의 내용을 포함하여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면,

연기하는 현상 작용에는 이름붙일만한 고정불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으니 제법무아 입니다. 제법무아이기에 실상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그 본질인 연기법과 무자성 공 무아 무상 중도는 변하지 않으니 색을 색이라 안하고 수 상 행 식 산 물 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으나, 중생들은 육안으로 산을 산이라 보고 물을 물이라 보니, 필요에 의해선 산을 물로 물을 산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의 불이법적 연기법적 반야 공의 관점) 또 가명은 공의 실상을 안다면 뭐라붙이든 상관없으며, 또한 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현상으로서 나타나며 이 현상은 본질에선 차별이 없고 공하지만 그 현상을 그저 육안으로 바라보면 모양에서 차별이 있으니, 그런 차별상의 관점으로 돌아와서 본질을 알면서도 그저 방편으로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교화하고자 중생의 눈높이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라고 예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불법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