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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와 불교의 관계에 대하여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길 : 부처님 가르침 공부 2021. 10. 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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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 주역이 승려?… '나랏말싸미' 6대 의문 따져보니

훈민정음(한글)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슬옹 세종 국어문화원 원장(문학?국어교육학 박사)은 "소헌왕후 사후에 해례본이 완성되자 세종은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옮겨 명복도 빌고 새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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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중앙일보의 기사 링크입니다.)

훈민정음 창제와 불교의 관계에 대하여


조선시대 지배층의 사상은 유교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승유억불이란 상황이 벌어지던 시대였죠.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의 업적이 잘 들어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는 애초에 시작단계부터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역사에 들어나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다른 부가적으로 들어난 여러 정황으로서 이 부분에 관해서 합리적인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였지만 세종대왕은 불심이 깊은 왕이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더불어 조선시대 당시 승유억불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불교와 스님들은 배척받았지만, 인도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고, 중국에서 다시 한반도로 전해진 불교 경전들을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한문은 기본이오 티벳과 인도어, 산스크리스트어까지 여러 언어에 능통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신미스님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서술되어있고, 소헌왕후의 승하 후 명복을 비는 행사에서도 2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모이고, 그 행사를 신미스님께서 주도했다는 사실이 세종실록 112권(세종 28년 5월 27일)에 기록되있기도 합니다.
신미스님의 속가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세종 시대 문장가였으며 집현전 학사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월인석보 1권의 쪽수가 108이며, 세종이 말로서 전했던 훈민정음 서문의 글자 수는 원래 109자였는데 세종이 여기서 1자 줄여 108자로 만들었다는 기록을 살펴본다면 한글 창제의 역사 이면에는 신미스님을 비롯하여 불교의 숨은 공로가 있었을 것이란 가설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아들인 수양대군이『석보상절』을 지었고, 세종 자신도 직접 찬불가 『월인천강지곡』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는 사실은 세종대왕의 불심과 한글 보급에 불교가 기여했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기도 합니다.

한글 창제를 주도한 것은 세종대왕일 것이지만 한글 창제에 기여한 공로자는 세종대왕 혼자만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상단 중앙일보 기사에 등장한 한글문화연대의 김슬옹 원장의 말대로 한글 창제가 있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과학·언어학적 배경이 지금보다 깊이있게 논의되고 탐구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이 글은 위 링크 주소의 중앙일보 기사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